(11)컴퓨터로 가축을 기른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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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0면

컴퓨터가 닭을 기르고 계란을 받아낸다.
서울 공릉동 617 양계전문기업인 천호그룹 전산실.
한국과학기술원 전산센터에서 파견 나온 구중회씨(33)가 이 회사의 전자두뇌「퍼킨 엘머3220」컴퓨터의 자판을 두드린다.
『15호 계사는 내일부터 조사량을 1시간 늘리고 1마리당 사료를 15g씩 늘릴 것.』
컴퓨터의 지시가 떨어지자 경기도 포천군 포천읍 설운리의 농장이 바쁘게 움직인다.
농장 책임자 노상진씨(34)는 자동 점등기의 타이머를 1시간 길게 조정하고 15호 계군 사료자동 공급기에도 1만마리분 사료 1백50kg을 더 배정한다.
천호그룹은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양계에 컴퓨터를 응용, 씨닭·병아리·닭고기 등을 공급하는 닭 재벌. 현재 서울근교 9개 농장에 종계 2만 마리와 고기용 계란용 닭 등 40만 마리를 컴퓨터로 사육하고 있다.
이 회사의 실제 톱 매니저는 바로「퍼킨 엘머」시리즈 3220 컴퓨터인 셈이다.
이 컴퓨터는 씨닭의 경우 개체번호·성별·부모번호·부화일자·체중변화·계란의 질· 벼슬 길이·사망원인 등 40여 가지의 형질과 특성을 개체별로 기억하고 있다.
닭 한마리 한마리의 호적과 일생 프로그램을 간직하고 있는 것이다. 개체·계군별 사료량·조사량·급수량·질병예방조치를 위해서는 물론 품질개량을 위한 교잡육종에도 중요한 자료다.
품종개량에는 선대들의 형질도 무척 중요한 자료가 되기 때문에 컴퓨터는 현재 살아있는 닭의 수십대 선대들의 상세한 신상명세서도 간직하고 있다.
40만 마리나 되는 대식구의 인사기록과 1일 5만 마리씩 부화되는 닭의 자료를 컴퓨터가 아니면 도저히 관리할 수 없다.
김호섭 영업부장(38)은『닭을 관리하는데 인간능력의 한계를 느껴 81년 1억2천만원을 들여 컴퓨터를 도입했다』는 설명이다.
육용 닭의 성장기간을 이를 단축하고(평균 7주) 산란용 닭의 달걀무게를 0·5g 늘리기 위해(평균 60g) 현재 컴퓨터는 육종 교잡상대를 선정하는 씨닭의 족보를 분석하고 있다.
『「마니나」백색 산란계 개체번호 8301157239번과 브라운 산란계 개체번호 8306273015번을 교접시키는 것이 알의 중량을 늘리는데 적합함.』
이는 컴퓨터가 찾아낸 첫 맞상대다.
『체구가 작아야 사료를 적게 먹을텐데 교접 후 산란계의 체중은 어떨까.』 전산실 구씨가 컴퓨터에 묻는다. 컴퓨터는 곧 이들 닭의 선대 혈통기록을 찾아 다시 답한다.
『「마니나」 8312036279와「브로일라」계통을 찾아 교배할 것.』
천호그룹은 오는 3월 포천과 양주군에 산재해있는 9개 농장에 단말기를 설치, 컴퓨터의 지시를 사람의 중계 없이 곧바로 받을 수 있도록 했다.
컴퓨터가 인간의 풍요로운 생활을 위해 초능력을 발휘하는 한편 인간이 섰던 발판 하나를 또다시 점령해 버리는 순간이다.
경기도 용인 자연농원의 양돈장.
21만평 대지 위에 5개 돈장 3만4천여 마리의 돼지가 컴퓨터 1대로 사육된다.
각 돈방마다 20∼30마리씩 들어있는 이곳 돼지는 귀 끝이 군데군데 잘려나간 것이 특색. 바로 각 돼지의 개체번호를 표시한 것이다.
컴퓨터는 암수 씨돼지의 젖량·출산율·육질·건강도·사료 요구율(체중이 1kg 느는데 필요한 사료량) 등 각종 자료를 보관, 종자개량의 기본자료를 제공한다.
뿐만 아니라 컴퓨터는 매일「내일의 작업지시」를 통해 개체별로 돈사이동·거세·예방접종·사료 공급량 등을 지시한다. 관리인은 이 지시를 충실히 따르기만 하면 된다.
한면수씨(31·관리과 기획담당)는『73년 처음 양돈을 시작했을 때는 고작 6백14마리에 불과했던 돼지가 50배가 넘는 3만4천여 마리로 불었으나 관리인은 고작 4배 정도 늘었다는 것이 컴퓨터 관리의 효율성을 단적으로 보여 주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79년 10월 도입한 컴퓨터가격은 6천3백만원. 컴퓨터가 닭과 돼지를 키우는 일이 낯설지 않다.
아직은 컴퓨터를 단순히 자료를 정리하는 사무기구로 생각하거나 비싼 가격 때문에 컴퓨터를 이용한 축산업이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있으나 생산관리에 컴퓨터를 이용하는 농장이 늘어나고 있다.
야생의 상태에서 인간에게 길들여진 동물들이 이제 기계의 지배를 받는 시대가 다가오고 있는 것이다.
이웃 일본에서는 생산 계획뿐만 아니라 축사의 관리 등 생산관리의 전 과정이 컴퓨터에 의해 자동화되어 있다. 사료를 주거나 축사의 환경을 돋보는 등 모든 과정이 사람의 손을 거치지 않고 컴퓨터로 처리되고 있다.
우리나라도 현재 기업규모의 농장이나 컴퓨터업계에서 이 같은 프로그램과 장치의 개발에 힘을 쏟고 있어 멀지않아 농장의 자동화 붐이 일 것으로 전망된다. <이덕령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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