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언자적 지정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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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9면

한국을 먹은 일본은 1930년 만주를 삼켜버렸다. 그 다음해 1931년은 일본군국주의 역사의 전환점이된다. 이해에 소위 5·15사건이라는 군부쿠데타가 일어났다.
당시의 수상「이누가이」(견양목당)는 무명의 청년장교에게 피습되었다. 수상은 청년장교들에게 『말하면안다』고 하였다. 청년장교들은 『대화무용』이라고 말하며 수상을 사살하였다.
이 사건은 일본민족의 문명의 기로가 되었다. 문민정치가들에게서 정권을 빼앗은 젊은 군인들에 의하여 일본은 절벽에 돌이 굴러가듯떨어져 가며 태평양전쟁이라는 씻을수없는 민족적 죄를 짓게 되였고 패전의 쓴잔을 마시지 않으면안되게되었다.
그후에도「대화무용」이라는 급진적인 사고방식은 오늘에 이르기까지 국제적로, 국내적으로 끊어지지 않고 있으며 사회적불안의 원인이 되고있다.
만일 인류가 과거에도 경험하였고 오늘도 경험하고있는 힘에 의한대결과 파괴를 거듭하지않고 평화속에서 공존하려고 한다면 대화의 길밖에는 없다. 이같은 점에서 오늘날 현대세계는 정치적 종교적 다원사회를 직시하면서 「아나테마 (저주) 에서 대화에로」 라는 새로운 슬로건을 내세우게되었다.
정치와 종교는 본래 사람들을「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에 정착시켜서 평안과 안식을 주고 사회에 정의의 질서를 창조해야한다는 과제를 가진다. 그러나 정치와종교는 타락하면 광신적인 악마성을 드러내며, 개체인격을 파괴하고 사회질서를 교란시키며 집단과 집단을 대립시키며, 나라와 나라 사이에 전쟁을 일으킨다.
왕은 정치를 상징한다. 왕의 권력이 불의와 짝하며 정치가 부패하였을때 예언자적 지성이 광야에 나타나서 철저한 부정의 논리를 펴낸다. 정치와 관련하여 예언자적 지성과함께 이스라엘에 나타나는것은 제사적 지성이다.
예언자적 지성은 정치적 현실을 신에 의해서 주어지는 이상상태(유토피아)에서 보는 현실비판적 혁명적인 이상주의자이며 인터내셔널한 아웃사이더이다. 이에 반하여 제사적 지성은 예언자처럼 신의심판을 말하지 않고 현실속에 있는 죄악을 치유하며 민중을 신과 화해시키려고 한다. 현실비판적이며 혁명적이려고 하는것 보다는 현실을 이해하고 현실에 적응하려는 경험적 태도를 가지고 있는 현실주의지성인 것이다. 현실주의지성은 언제나 네이션의 인사이드에 서는 인사이더다.
정치와 관계하는 지성의 이상은 예언자적인 것과 제사적인 것과의 아름다운 조화에 있다. 「라인흄드니버」는「기독교적현실주의」라는말로 이 이상을 밝혔다.
그러나 보수와 혁신사이에 열려있는 좁고 험한 길을 가려는 현실주의에는 큰 유혹이 기다리고있다. 현실에 적응하면 할수록 알지못하는 사이에 자기이익과 맺어진교활한 수단이 늘어나고 드디어는 예언자적 지성을 추방하는 역할을 하게된다.
비판정신을 잃은 제사적 지성은 결국 현실적응이라는 선속에 숨겨진 현실긍정이라는 악을 보지못한것 때문에 현실을 이상으로 끌어올리는 힘을 상실하게된다. 현실주의라는 선의 등에 얽혀서 토착적인 보수적 내셔널리즘을 등장시키고 만다.
예언자적 지성은 피와 흙이라는 자연적 유대로 맺어진 자연공동체를 초탈하여 서 있는(existere) 아웃사이더적 실존이다. 그러기에 예언자는 구약의 「아모스」나 「예레미야」 처럼 왕의 죽음을 예언하고 조국 유대왕국의 멸망을 예언한다.
세례「요한」과「예수」는 동족들을 향하여 신에게 선택받은 선민「아부라함의 아들」 이라는 엘리트의식을 뿌리째 뽑아 버리라고 외쳤다. 예언자적 지성의 논리는 철저한 부정의 논리이다.
예언자적 부정의 논리에 의하면 모든 안슈탈트(제도)로서의 국가와 교회와 성전은 죄이나 이같은 부정의 논리는 이스라엘 역사에서뿐 아니라 기독교의 역사안에 계속 나타났다. 「어거스틴」시대의 도나티스트, 종교개혁시대의 재침례파, 17세기의 청구도, 그리고 그후의 개신교의 여러분파운동이 바로 그런것이다.
청교도혁명이 신격화된「찰즈 1세」를 처형한 이후 영국에서는 절대군주의 대두가 불가능하게 되었다. 현실적효과가 없는것은 아니다.
2차대전이 종결되기 1주일전에「히틀러」암살사건에 참여하였다는것 때문에 39세의 젊음으로 교수대의 이슬로 사라진 독일신학자「폰회퍼」는 청교도가 17세기에 한일을 20세기에 수행하려고 하였던것이다.
제사적 지성은「이것이냐, 저것이냐」하는 예언자적 부정의 논리, 흑백논리를 용허하지 않는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예언자를 죽였다. 그모순에 가득찬 부정의 논리를 참을수 없었기때문이다. 그렇다면 왕과 예루살렘은 평안하였는가.
아니다. 일본에서 학원분규가 일어났을때 대학은 기동대를 불러서 문제의 학생들을 제거했다. 그모순을 참을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으로 학원사태는 해결되었고 질서를 회복하였는가.
여기에서 우리는 예언자적 부정의 논리와 학원사태에 대하여 보다 날카로운 시선을 돌려보자. 예언자적 지성이 지닌 문제는 그 심판이 구원을 가져오지 못한다는 것이 아닐까.
부정의 논리는 외향적인 것이라는 단순한 사상으로 퇴화될때 전혀 이질적인것, 자기긍정의 죄를 침입시킨다.
그때부터 부정의 논리는 안에는 위선성, 밖으로는 강폭성을 나타내면서 자기절대화와 오만의 죄에 떨어지게 된다. 사람의 눈이 자기를 보기 보다도 타자를 보도록 되어 있듯이 부정의 논리가 가지는 자기부정의 빛이 희미해지면서 그 비판은 타자지향적인 것이된다. 그때 예언자적 지성은 공격적 지성으로 퇴화된다. 그리고 자기는 늘 선과 정의의 입장에 있다고 착각하며 열려진 대화를 전적으로 폐쇄하게 된다.
물론 억압된 이들이 폭력으로 저항하게 될때「힘과 정의의일치」가 이루어지는 수가 있다. 그러나 그일치는 역사속에서 언제나 원리적이아니라 상징적이며, 영구적인 것이아니라 감정적인 것일뿐이다.
정의를 요구하며 외친 메시아대망이 이스라엘의 승리와 번영을 가져다 주었을때 그 정의의 실현과함께 이스라엘민족의 에고이즘의 만족과 교만이 싹텄기 때문이다.
예언자적 부정의 논리는 자기부정을 포함한다. 예언자는 조국과 동족의 죄를 심판한다. 그러나 그는 신의 심판을 고하는것 때문에 신의 자리에 앉는것이 아니라 죄의백성가운데 한사람이 된다. 동족의죄는 자기의 죄이다. 결국 부정의논리는 사람의 유대성을 통하여『타자의 죄를 짊어진다』는 새로운 존재양식을 남는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에서보듯 예언자적 부정의 논리가 폭로한 죄는 심판이 아니라 사랑과 용서에의해서 극복된다. 사람이 옛 사람에서 새 사람으로 바꿔지고 에고이즘을 극복하게 되는 것은 심판의 엄숙성이 아니라 용서의 깊이에서이다. 새역사를 창조하는 힘은 심판이 아니라 사랑과 용서이다.
대학이 대학으로서 설수있는 근본조건은「칸트」가 말하였듯이『이성적이면서 책임능력있는것』이라는 인격성의 이상밖에는 없을것이다.
학생운동은 자기시선의 단락때문에 뜨거운 희망을 걸었던 엑스타시를 이성적인 책임윤리와 맺는 방향으로 전환시키는 한에서만 참된 정치적 의미를 가질수있다. 우리는 이미 왕없근 민주사회에 살기 시작했다. 왕없이 사는 민주시민은 좋은정치를 신적 카리스마를 가지고있는왕에게 기대하지말고 시민각자가 그 카리스마를 회복하여야한다.
그때 종말은 심판이 아니라 희망의 상아래서 보여지게 될것이다. 다가오고 있는 학원의 봄에 아나테마 (저주) 가 아니라 디아로구(대화) 의 새바람이 불어오도록 하면어떨까. 우리는 「대와무용」의 시대가 아니라 절실하게 「교제의 의지」(야스퍼스)를 요청하고 있는「대화유용」의 시대에 살고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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