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쏭달쏭 북·중이야기(13)] 김정일과 후진타오

중앙일보

입력

2006년 10월 9일 오전 10시 15분.
후진타오는 제16기 6차 중앙위원회 전체회의(6중 전회)를 진행하다가 깜짝 놀랐습니다. 북한이 20분 뒤에 핵실험을 한다는 보고를 받았지요. 김정일이 이런 중요한 일을 사전에 협의도 없이 20분 전에 일방적으로 통보한 것입니다. 평양 주재 러시아 대사관에는 2시간 전에 알려준 것과 대조적이었지요.

후진타오는 몇 개월 전부터 그토록 달랬지만 결국 눈앞의 현실로 드러나자 망연자실할 뿐이지요. 그는 긴급회의를 소집해 중앙외사영도소조(조장 후진타오)와 외교부 보고를 듣고 대책을 논의했습니다. 중앙외사영도소조는 중국의 대외정책을 결정하고 주도하는 기구입니다. 후진타오는 외교부 대변인을 통해 중국의 입장을 발표합니다.

루젠차오 대변인은 “북한이 국제사회의 광범위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제멋대로(悍然)로 핵실험을 했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쓰인 ‘제멋대로(悍然)’라는 표현은 중국어에서 극도로 분개할 경우에 사용하지요. 1969년 소련과 우수리강 국경분쟁과 1979년 베트남과 무력충돌 때 사용했다가 27년 만에 외교부 대변인의 입에서 나왔지요. 후진타오의 분노를 보여주는 대목이지요,

2003년 3월 국가주석이 된 이후 후진타오는 북핵을 유심히 관찰했습니다. 이유는 부시 행정부의 대북 강경 정책과 이로 인한 대중 압박이 그의 책상 위에 놓여 있었기 때문이지요. 부시 대통령은 2002년 1월 29일 연두 국정연설에서 북한을 ‘악의 축’으로 규정했습니다. 이에 앞서 미국 국방부는 2002년 1월 8일 의회에 핵태세보고서(NPR, Nuclear Posture Review)를 제출하면서 선제 핵공격과 실전용 소형 핵무기 개발을 대한 의지를 담았습니다.

과거의 미국의 핵전략은 상대방이 핵을 먼저 사용하지 않는 한 핵으로 보복하지 않고 비핵국가에 대해서는 핵무기를 사용하지 않는다는 소극적인 안전보장 개념이었지요. 북한은 이런 미국의 입장 변화에 ‘일사부전’의 자세를 취했습니다.

후진타오는 이런 대외적인 악조건에서 취임했고, 미국은 그에게 적극적으로 북한에 영향력을 행사할 것을 요구했습니다. 미국은 중국이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미국의 생각과 달리 북한은 중국의 압력에 순순히 응하지 않았습니다. 아직도 학계에서는 중국의 대북 영향력을 놓고 찬반 의견이 엇갈리고 있지요.

일부는 미국의 시각처럼 그 동안의 북·중 관계를 고려해 중국이 압력을 행사하면 북한이 따를 것이라고 생각하지요. 중국이 강대국이고 북한이 약소국이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중국의 주장대로 북한도 엄연한 주권국가이기 때문에 중국이 압력을 행사하더라도 선별적으로 따를 뿐이라는 것이지요.

그 논쟁의 결과를 보면 후자가 판전승을 거두었습니다. 중국이 북한에 어느 정도 압력을 행사할 수 있지만 결정적인 부분에서는 압력이 통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후진타오가 선택한 것은 ‘적극적인 설득’입니다. 그 가운데 일정 부분 압력도 포함돼 있었지요. 그는 우선 제2차 북핵 위기를 대화로 풀기 위해 6자 회담을 기획하고 2003년 8월부터 차분히 진행했습니다. 하지만 미국과 북한이 의견 차이를 좁히지 못하자 난항을 거듭합니다.

그 때마다 우방권 전인대 상무위원장 (2003년 10월 29~31일), 리창춘 정치국 상무위원 (2004년 9월 10~13일), 탕자쉬안 국무위원 (2005년 7월 12~14일), 우이 부총리 (2005년 10월 8~11일), 후이량위 부총리 (2006년 7월 10~15일) 등을 보냈지요. 그리고 이들이 방북할 때는 경제 지원도 포함돼 있었지요.

우방궈 상무위원장이 방북했을 때는 북한의 요구대로 ‘대안친선유리공장’을 건설해 주었지요. 건축 비용은 약 2,400만 달러가 들었습니다. 이것만으로 부족해 후진타오는 김정일을 2004년 4월, 2006년 1월 등 두 차례 중국으로 초청했고 자신도 2005년 10월 평양을 방문했습니다. (계속)

고수석 통일문화연구소 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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