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설 신화, 다시 '따논 까올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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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20일 태국 최남단 나라티왓주 나라티왓시. 쭉 뻗은 4차로 대로가 눈에 들어왔다. 태국 남부 도시 빠따니와 나라티왓을 잇는 총 길이 98㎞의 도로다. 공식 명칭은 ‘빠따니~나라티왓 고속도로’. 1965년 11월 1일 현대건설이 540만 달러에 수주한 한국의 첫 해외 건설 작품이다. 50년이 흘렀지만 현지에선 지금도 이 도로를 ‘따논 까올리(한국 도로)’라고 부른다. 나타퐁 시리차나(55) 나라티왓 주지사는 “당시 공사에 참여한 한국 근로자에 대한 인상이 워낙 강하게 남아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나라티왓은 연중 낮 기온이 30도를 넘는다. 매일 열대성 소나기 ‘스콜’이 쏟아진다. 땅을 다져 놓으면 비가 쓸어버리기 일쑤였다. 그때까지 건설 경험도 거의 없었다. 국내에서 3㎞ 거리의 비행장 활주로 몇 개를 다져본 게 전부였다. 미국인 감독관이 “당신들이 공기 안에 준공하면 내 손에 장을 지지겠다”고 했을 정도다. 그러나 당시 정주영 현대건설 사장은 “25개월 안에 끝내겠다”며 공사를 따낸 뒤 약속을 지켰다. 비 때문에 모래·자갈이 젖어 도로를 포장할 아스콘(아스팔트 콘크리트)을 제때 조달할 수 없자 정주영 사장은 골재를 철판 위에 올려 구워내 쓰는 기상천외한 묘안을 내기도 했다.

 현장에 참여했던 백동명(74) 전 현대건설 전무는 “태국 고속도로 공사는 무에서 유를 창조해낸 악전고투의 현장이었다”며 “훗날 한국 건설회사들이 중동시장에 나가 쟁쟁한 해외 경쟁사를 물리치고 공사를 수주하는 데 밑거름이 됐다”고 회고했다. 태국 고속도로 공사에선 300만 달러 적자를 봤다. 그러나 이 실적을 앞세워 한국 건설사들은 베트남·인도네시아·말레이시아 등 동남아시아에서 잇따라 건설공사를 수주했다. 이는 다시 70년대 중동 붐으로 이어졌다. 동아건설이 84년부터 19년간 공사한 리비아 대수로 공사(3000㎞)는 총 수주액이 105억6000만 달러에 달했다. 두 차례 오일쇼크로 한국은 국가 부도 직전까지 갔지만 오일머니 덕에 위기를 넘겼다.

 해외 건설은 지금도 달러 박스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다. 올해 누적 수주액은 7000억 달러 돌파를 코앞에 두고 있다. 지난해에만 660억 달러를 수주해 반도체·조선·철강 수출액을 앞질렀다. 그러나 최근 해외 건설업은 사면초가에 몰려 있다. 밖에선 금융위기로 발주사업이 줄줄이 연기된 데다 중국의 추격이 거세다. 안에선 이명박 정부 시절 호남고속철·4대강 사업 입찰 때 담합했다는 혐의로 1조원이 넘는 과징금을 맞았다.

 전문가들은 해외 건설 진출 50주년을 맞은 올해야말로 50년 전의 ‘따논 까올리 정신’을 되살려야 할 때라고 강조한다.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는 도전정신과 한국인 특유의 창의력으로 대내외 악재를 돌파하면 새로운 기회가 올 수 있다는 얘기다. 2000년대 들어 제2의 중동 붐도 일고 있다. 이복남 서울대 건설환경종합연구소 교수는 “해외 건설시장은 여전히 성장 잠재력이 크다”며 “한물간 사양산업이나 비리·부패로 얼룩진 산업이라고 치부할 게 아니라 수출 첨병으로 거듭나게 해야 한다”고 말했다.

나라티왓(태국)=이태경 기자 세종=김민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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