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지날과 팥죽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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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동지날, 기상예보를 훨씬 웃도는 추위에 우리집은 개천을 끼고 있어 바람이 드세므로 체감온도를 따진다면 앞집과도 차이가 날 정도다. 결혼한지 6년이 지나고 있으나 시어머니의 후한 인심과 따로 사는 핑계로 여태까지 한번도 팥죽 끓이는 시험을 거치지 않았다. 그래서 동지날도 내겐 별다른 의미없이 평범한 날에 불과했다.
그날도 왠지 몹시 춥다고만 느껴져 웅크린 몸과 마음으로 저녁 7시가 넘도록 가장 간단한 방법으로 저녁 때울 궁리를 머리로만 짜고 있는데-.
『아이고!』비명이다.
노크없이 갑자기 열려진 방문 앞에는 그날이 가면 73세가 되는, 한쪽다리가 불구이며, 장거리 외출엔 보호자가 동행해야하는 우리엄마의 얼굴이 심한 기온차로 인해 연기같이 솟아오르는 김과 함께 신령처럼 흰머리만 돋보였다. 『저녁 아직 안묵었재? 오늘이 무슨 날인줄 몰랐재? 은지어마이(올케) 알면 지가 갔다줄라 칼까봐 살째기(살짝) 왔다. 문 닫아라. 바람디간다. 나는 간대이.』
망연자실! 짧은 순간이 지나고 뒤따라 뛰어가니 칠순의 노모는 머플러 한장없는 몸으로 절뚝거리며 골목을 접어들고 있었다.
그야말로 슬그머니 나오려고 마당에서 입는 두꺼운 스웨터조차도 없이, 슬리퍼를 신고 절뚝거리며 팥죽을 안고 개천바람을 맞으며 십여분을 걸어서 오신 노모. 서른 넘은 중년의 딸에게 옛날 어릴 때처럼 팥죽의 새알심을 나이만큼 먹이기 위해-.
먼길을 달려온 노모의 정성이 절로 눈시울이 뜨겁기만 하다. <서울 서대문구 북가좌동 36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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