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앵커멘 최동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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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1994년. 국제 도시 서울의 정월은 하순이 되자 문득 한달 내내 지속돼온 설날 축제가 절정에 이른다.
이제는 55세의 초로의 신사가 된 최동호씨도 이 정월 축제 기간동안 만큼은 그의 개인 로보트에게 금족령을 내리고 비누거품이 펄럭이는 거품 면도기로 아침을 시작할 권리가 있다.
앵커맨 최동호를 동양의「월터·크론 카이트」로 만들어 놓은 것은 1988년에 있었던 서울국제 올림픽이었다. 이 국제 올림픽은 하나의 기적을 낳았는데 올림픽에 참가했던 세계의 오만한 지적 호사가들이 한국을 「동양의 오펄」이라고 부르며 그만 「코기아 신드럼」이라고 불리는 한국에 대한 멈출 수 없는 상사병에 빠져 버렸다는 사실이다.
앵커맨 최동호가 진행하는 9시 뉴스를 세계인들은 「아리랑 저널」이라고 부른다. 1994년의 세계 시민들이 자신의 안방에 세계 각국의 모든 채널을 다 소유하고 있다는 것은 조금도 이상한 일이 아니다. 그러나 어느 나라의 채널을 돌리든지 동시 번역이 되어 나오는 뉴스의 내용은 대동소이하기 짝이 없다.
최동호의 신화는 그가 가공할 인공지능을 소유하고 있는 앵커 로보트들을 모두 물리쳐 버렸다는데 있다. 수많은 세계의 앵커맨들이 인공지능을 지닌 앵커 로보트들의 박식과 추리력과 가공할 암기력에 백기를 들고 퇴장해 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그러나 최동호는 언제나 특종과 유머를 심장 속에 숨긴 채 밤 9시면 아리랑 차임벨과 함께 세계 시민들 앞에 나타난다. 그는 이제 10년 전처럼 오만하지도 차갑지도 않으며 통일 문답 시간이면 보이곤 하던 제2 송곳니 부근의 냉소 같은 것도 발견할 길이 없다. 그의 매력은 지적 관능과 뜨거운 유머 곁에서 흩날리는 성성한 은발이다. 그것은 로봇의 심장으로는 도저히 얻어낼 수 없는 그 하나의 특종을 얻기 위해 남몰래 몸으로 뛰어야 했던 기자적 형벌의 상징이다.
그러나 이 정월만큼은 최동호에게도 유토피아다.
2년 전 국회는 설날 축제 동안만큼은 대한민국에선 절대 로보트와 자동차 사용을 금지한다는 이른바 「향수법」을 통과시켰는데 이 법률은 세계 입법 사상 가장 아름답고 서정적인 인간회복의 법률로 기록되고 있다.
대신 설날 축제 기간 동안 대한민국의 모든 로보트들은 인력거꾼으로 변신한다. 한복으로 정장한 사람들은 인력거를 타고 부모와 스승을 찾는 감동적인 정월 여행을 시작한다.
하오 2시. 취재를 떠나려는 최동호에게 한 통의 전화가 걸려온다. 지난해 로보트에게 앵커맨의 자리를 빼앗긴 세계 뉴스계의 노객인 영국의 「골딩」경이 한국에서 위로 휴가를 갖기 위해 공항에 도착했다는 우수에 찬 전갈이다.
『우선 「골딩」경에게 위로를…』
최동호는 한복에 두루마기를 걸쳐 입고 마당으로 나선다. 잘만하면 「골딩」경 자체가 특종이 될 수 있다. 인력거의 회장을 젖히자 문득 삶의 노스탤지어가 풍겨온다.
그러나 특종에 강한 최동호가 아직 모르고 있는 사실이 하나있다. 그것은 잔인한 태풍에 여자의 이름을 붙였던 오명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는 여성들이 가정용 로보트에겐 남성의 이름을 붙이기 시작했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이따금 담장 너머로 들려오는 「동호야」라고 가정용 로보트를 불러대는 여성들의 싱싱한 음성에서 세기말적 해학이 느껴진다.<강유일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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