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박정호의 사람 풍경] 일상 속 작은 기부 '미리내운동' 김준호 대표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14면

미리내운동본부 김준호 대표는 장돌뱅이다. 주말마다 전국을 누빈다. 그의 의문 하나. 왜 서울 강남 지역의 참여가 저조할까. “겉은 화려하지만 마음의 여유가 없는 탓일 것”이라고 말했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질서는 아름답다. 명함 크기의 파란 쿠폰 350여 장이 가게 한쪽 벽에 가지런하게 붙어 있다. 200원부터 5만원까지 쿠폰에 적힌 금액은 제각각이다. 그래도 마음은 하나다. 십시일반(十匙一飯), 나보다 못한, 혹은 당장 주머니가 빈 사람들의 배를 불려주기 위해 손님들이 내놓고 간 돈이다.

 서울 홍은동, 명지대 인근에 있는 분식집 ‘토스트와 주먹밥’ 풍경이다. 2013년 5월 시작된 ‘미리내 가게’ 회원점 중 하나다. ‘미리내’는 말 그대로 미리 돈을 내는 선불(先拂) 개념이다. 일상 속의 소박한 나눔 현장이다.

 미리내운동이 소리·소문 없이 퍼져가고 있다. 출범 2년도 안 되는 짧은 기간 안에 전국 400여 회원점을 확보했다. 너와 내가 함께하는 세상을 일구는 사람들의 온정을 느끼게 한다. 지난 1일 삼일절 오후 ‘토스트와 주먹밥’에서 미리내운동본부 김준호(43) 대표를 만났다. 서글서글한 인상, 초면의 긴장감을 단박에 무너뜨린다.

서울 홍은동 ‘토스트와 주먹밥’의 최정원 사장(왼쪽)과 함께한 김준호 대표.

 - 교수(동서울대 전기정보제어과)가 본업이다.

 “주말을 이용해 미리내 활동을 한다. 전국을 돌아다니며 가게 주인들과 만난다. 현장에 직접 가야 자세한 사정을 알 수 있다. 울릉도와 독도를 빼고 안 간 곳이 없다. 주로 금요일 밤에 내려가 토요일 오후에 올라오는 일정이다.”

 - 그간 경비도 수월찮게 들었겠다.

 “교통비와 밥값만 있으면 된다. 한 달 평균 20만원 정도 쓴다. 부담이 될 수준은 아니다. 외부 강연료로 충당할 수 있다. 또 돈이 모자라면 어떤가. 나중에 벌면 된다. 나는 멍석을 깔아주는 사람이다. 나머지는 다 가게 주인과 손님이 하는 일이다.”

 - 확산 속도가 놀랍다. 예상한 일인가.

 “전혀 아니다. 처음에는 10~20곳가량 동참할 것으로 봤다. 미리내운동은 신뢰가 기본이다. 손님들이 사장을 믿지 못하면 아무리 적은 돈이라도 어떻게 맡기겠나. 지금까지 아무런 사고가 없었다. 가게 주인을 전혀 모르면서도 매달 2만~3만원씩 부쳐오는 사람도 적지 않다. 우리 사회가 불신지옥이 아니라는 사실을 새삼 깨닫게 됐다.”

 미리내운동의 고향은 이탈리아다. 100여 년 전 나폴리에서 발아한 ‘맡겨놓은 커피(Caffe sospeso, 영어로 Suspended coffee)’가 모체다. 가난한 사람을 위해 누가 대신 돈을 치른 커피를 뜻한다. 지난해 12월 뉴욕타임스는 입소문·트위터 등을 타고 미국·스웨덴·브라질 등 지구촌 곳곳에서 유사한 운동이 일어나고 있다고 보도했다.

 미리내운동에도 온라인의 기여가 컸다. 일정액을 기부한 사람들이 소셜미디어네트워크(SNS)에 인증샷을 올리며 홍보대사 역할을 했다. 현재 미리내운동 카카오스토리(story.kakao.com/#ch/mirinaeso)에 친구로 등록한 사람이 17만 명에 이른다.

가게 손님들의 기부금과 그 사연을 적어 놓은 쿠폰들.

 - 처음 발을 들여놓은 계기가 있다면.

 “서울과학기술대에서 미디어공학을 전공했다. 박사 과정을 마칠 무렵 기술로 사회에 이바지할 수 있는 게 뭐가 있을지 고민했다. 전화를 한 통 걸면 기부도 자동으로 되는 스마트폰 앱 ‘기부톡’을 만들었는데 참여 열기가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 시스템으로는 문제가 없었지만 아직 관련 문화가 성숙되지 않았음을 알게 됐다. 그러다가 ‘맡겨놓은 커피’에서 아이디어를 얻게 됐다. 경남 산청의 후후커피숍이 1호점이다.”

 - 우리나라와 실정이 다르지 않나.

 “왜, 중국집에 음식을 시키면 10번에 한 번은 무료로 주지 않나. 커피숍도 그렇고…. 처음에는 그런 쿠폰을 활용할 작정이었다. 밥보다 커피를 즐겨 찾는 시대가 됐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커피보다 밥이나 분식이 더 어울릴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현실은 예상을 초월했다. 전혀 상상하지 못했던 아이템이 추가됐다. 모두 삶의 현장에서 나온 것이다.”

 - 예를 들면 어떤 게 있나.

 “휴대전화가 대표적이다. 강원도 강릉 가온길텔레콤, 서울 용산 폰플레이, 대구 스마트폰백화점 세 곳에서 하고 있는데 손님들이 내놓은 중고폰을 수리해 휴대전화를 살 수 없는 학생이나 외국인들에게 전화를 개통해준다. 선불폰이라 정해진 액수만큼 사용하면 된다. 기술 전수도 있다. 일종의 재능기부다. 점주들이 실비만 받고 노하우를 전수하는 형태다. 부산의 고로케데이, 부안의 슬지네찐빵, 군포의 명짬뽕 등 40여 곳에 이른다.”

 이날 인터뷰에는 ‘토스트와 주먹밥’ 주인장 최정원(54)씨도 함께했다. 최씨네 가게에는 헌혈증을 받는다는 안내문구가 있다. 헌혈증을 내면 자신이 원하는 것을 마음대로 골라 먹을 수 있다. 유사한 활동을 하는 회원점이 전국에 30여 군데 있다. 최씨는 “지난해 인근 명지고 학생이 백혈병에 걸린 적이 있다. 전국 회원점에 연락, 헌혈증 674장을 전달했다. 돈으로 따지면 대단한 액수”라고 했다.

 김 대표는 “회원점 가운데 커피숍은 30% 남짓이다. 술집만 빼고 모든 업종이 모였다고 보면 된다. 동물병원에선 버려진 개나 고양이를 보살핀다. 악기상에선 기타 줄을 갈아준다. 당구장에선 손님들이 내놓은 푼돈을 모아 유용하게 쓴다. 목욕탕과 펜션도 있다. 누가 갑자기 큰돈을 낼 수 있겠는가. 각자 능력과 사정에 따라 할 수 있는 범위 안에서 하면 된다. 그런 마음이 쌓여 지금까지 왔다”고 말했다.

 - 나눔의 전염력이 역시 강한 모양이다.

 “우리에게는 ‘쏘는’ 문화가 있다. 군복만 입고 있어도 선배들이 계산을 해주는 경우가 있지 않나. 우리 조상들은 지나가는 나그네에게 아무 조건 없이 사랑방을 내주었다. 걸인이 오면 무엇이라도 먹여 내보냈다. 그런 아름다운 문화가 있었다. 두레·품앗이가 사어(死語)는 아닐 것이다. 나눔은 습관이다. 그리고 순환이다. 거창한 게 아니다. 결국엔 내가 덕을 보게 된다. 미리내는 순우리말로 은하수를 뜻한다. 우리 각자가 빛나는 별이 될 수 있다고 믿는다.”

 - 세상을 아름답게만 보는 건 아닌지.

 “예전에는 매사가 짜증스러웠다. 지금은 아니다. 긍정의 에너지를 찾게 됐다. 나쁜 뉴스가 계속 터지지만 그건 드러난 사건일 뿐이다. 보도되지 않은 좋은 소식이 훨씬 많은 게 사람살이다. 전국에 있는 사장님과 다 친구가 됐다. 쌀·과일·떡·만두 등 거의 모든 생필품을 그들에게 주문한다. 팔도가 시장인 셈이다. 목사도 신부도 나만큼 좋은 사람을 많이 만나지 못할 것이다.”

 - 어려움도 적지 않았을 텐데.

 “일부 엉뚱한 제안도 있었다. 회원점에 카드 단말기를 함께 들여놓자, 혹은 지역 총판권을 달라는 이들이 있었다. 제사보다 젯밥에 관심이 많은 사람들이다. 그런데 미리내는 돈을 버는 운동이 아니다. 또 수직적 구조가 아니다. 나는 회원들을 수평으로 연결해 주는 신경망일 뿐이다.”

 - 하루하루가 신바람 나겠다.

 “복지체제가 아무리 완벽해도 빈틈이 생길 수밖에 없다. 미리내운동은 그 틈을 메우는 작업이다. 동네 가게 주인만큼 이웃 사정을 잘 아는 이가 있겠는가. 현재 50여 곳의 신청이 밀려 있다. 올해 1000곳으로 늘리고 싶다. 터무니없는 욕심이 아니다. 회원들이 한 곳만 추천해도 800곳이 된다. 이만한 다단계도 없을 것 같다. 하하하.”

 지난달 말 미리내운동 주제가도 나왔다. 회원이 리더로 있는 밴드 ‘종로사운드’에서 발표한 ‘미리내마켓’이다. 각종 음원 사이트에도 올라와 있다. 그 한 구절. ‘누굴 돕는 일이 힘들지는 않아. 주머니 속 동전도 할 수 있다고’. 인터뷰를 마치고 나오며 기자도 미성(微誠)을 보탰다. 사무실에 돌아오니 미리내 상징인 파란 모자를 쓴 캐릭터가 인사말을 보내왔다. ‘미리내 주셔서 감사합니다’.

[S BOX] 성선설 믿는 한국인 39% … 30년 새 21%P 줄어

기하급수로 늘어나는 이웃 사랑을 다룬 영화 ‘아름다운 세상을 위하여’의 헤일리 조엘 오스먼트.

미리내운동은 인간의 본성이 선하다는 입장에 동의한다. 김준호 대표도 그렇게 믿는다. 그는 “언론에 나오는 흉악한 사건·사고는 사회 전체의 작은 부분일 뿐”이라고 말했다. 미리내운동과 성격이 비슷한 미국 서스펜디드 커피 페이스북에는 지난달 말 흥미로운 기사가 실렸다. 인간의 진화를 이끌어온 가장 큰 동력은 지성이 아니라 동료에 대한 연민과 동정이라는 영국 요크대의 연구 결과가 인용됐다. 세계적 인지과학자 스티븐 핑커도 지난해 국내에 번역된 『우리 본성의 선한 천사』에서 “인류는 역사상 가장 평화로운 시대에 살고 있다”고 주장했다.

 인간의 선행이 복제·확산될 수 있다는 가설을 영화화한 것으로 ‘아름다운 세상을 위하여’(원제 Pay it forward·2000년)가 있다. 케빈 스페이시, 헬렌 헌트, 헤일리 조엘 오스먼트 등이 나온다. 남의 도움을 받으면 다른 사람 셋에게 또 다른 도움을 베풀라는 줄거리다. 영화가 화제가 되면서 미국에서는 ‘Pay it forward’ 재단도 출범했다. 재단을 상징하는 팔찌가 전 세계 100개국에 보급되기도 했다.

 그런데 요즘 우리들의 살림살이가 예전보다 팍팍해진 것일까. 한국갤럽이 지난달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선하다’고 믿는 한국인은 지난해 39%에 그쳤다. 외환위기가 심각했던 1997년의 56%보다 크게 낮은 수치다. 84년 첫 조사에서는 60%였다. 반면 ‘선과 악이 동시에 있다’는 이는 84년 14%에서 지난해 37%로 껑충 뛰었다. 그만큼 사회 전체가 현실적이 된 걸까.

글=박정호 문화·스포츠·섹션 에디터
사진=권혁재 사진전문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