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려라공부] 엄마가 읽으니…딸들도 독서광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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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 둔산여고의 ‘솔뫼 어머니 독서회’ 회원 어머니들은 매달 아이들에게 필요한 책을 골라 읽고 토론을 벌인다.

16일 낮 대전 둔산여고 어머니 10여 명이 학교 도서관에 모여 도란도란 얘기를 주고받았다. 간간이 고개를 끄덕이거나 웃음보를 터뜨리기도 했다. 이날 대화를 따라가 봤다.

▶장경자(47)씨=고2인 딸아이와 함께 동인문학상 수상작을 읽고 있어요. 1960년대 수상작부터 시작해 지금은 90년대 소설을 읽고 있죠. 수상 당시 사회상이나 시대상을 알 수 있어 좋아요. 딸아이가 수능에도 도움이 된다고 해서 웃었어요.

▶이정림(45)씨=우리 아이는 내가 책을 읽을 때면 다가와 '엄마 무슨 책 읽어요. 어때요. 좋아요'라고 물어요. 예전엔 무슨 책을 읽든 관심을 보이지 않았는데 말이에요. 최근엔 성장소설인 '짜장면'을 같이 읽었어요. 가출 얘기가 나오는데 아이가 '그렇게 하고 싶은 걸 이해한다'고 말하더군요.

▶윤상현(44)씨=전 딸아이와 함께 읽은 황우석 서울대 교수의 '나의 생명 이야기'란 책이 기억나네요. 역경을 딛고 훌륭한 과학자가 되는 과정에 대한 얘기였는데 아이에게 배고파도 먹을 게 없던 시절을 알려줄 수 있어서 좋았어요.

▶백은희(45)씨=사실 저도 아이에게 그 책을 줬어요. 황 교수가 '등 안 대고 공부하기 클럽'을 만들어서 열심히 공부했다는 내용이 있거든요. 내심 우리 아이도 따라 배우길 바라서였죠.

▶최미은(45)씨=그래요? 우리 아이는 등 안 대고 공부하기 클럽을 해서 (황 교수의) 점수가 그것밖에 안 나왔을 거라고 하더군요. 그리곤 황 교수가 우직했을지는 모르지만 지혜롭진 못했다고도 하고요.

순간 웃음이 터졌다. 어머니들의 대화는 이어졌다.

▶류혜영(44)씨=얼마 전 아이가 창고에서 '채근담'을 꺼내왔어요. 누렇게 바랬고 700원이란 정가표가 붙었더라고요. 아이가 자랑스럽다며 책가방 안에 넣어 가지고 다녔어요. 20~30년 전에 읽었던 책을 아이와 함께 다시 읽는다는 게….

▶장경자씨=전 책을 읽을 때 줄을 긋고 느낌을 써요. 아이가 그 메모를 볼 때마다 '엄마는 이랬군요'라고 얘기해요.

▶안애라(45)씨=고3인 딸은 이러던 걸요. 엄마의 생각을 읽는 건 좋지만 책을 읽는 데 지장이 있다고요. 생각이 달라서겠죠. 그래서 책을 살 때 두 권씩 사는 경우도 있어요.

다시 웃음이 터졌다. 이들은 이 학교 '솔뫼 어머니 독서회' 회원이다. 회원은 30여 명. 지난해 8월부터 매달 한두 차례 아이들에게 필요한 책을 선택해 읽고 토론해 왔다. 아이들에게 자연스럽게 독서 환경을 만들어주면서 동시에 책을 소재로 아이와 대화하는 시간을 좀 더 가질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하는 마음에서였다.

예상대로였을까. 이자영(45)씨는 자녀와 이런 대화가 오갔다고 소개했다. "아이가 먼저 '칼의 노래'를 읽으라고 권하더군요. 며칠 뒤엔 '아직도 못 읽었어요'라고 채근하고요. 저의 생각을 묻기도 하고요." 윤영숙(42)씨는 "고1인 딸아이가 제가 책을 보면 '나중에 읽어야지'라고 해요. 얼마 전엔 도서관에서 빌려 '동화 밖으로 나온 공주'를 읽고 있었는데 바로 '엄마 사놔'라고 하더군요. 만화나 인터넷 소설을 즐기던 딸이기에 사달라는 말이 어찌나 반가웠는지 몰라요"라고 말했다. 김건부 교장은 "어머니의 독서활동 참여를 통해 자녀의 독서능력을 향상시키기 위해 모임을 만들었다"며 "이후 자녀의 독서 습관이 좋아지는 게 보인다"고 전했다.

도움을 받는 건 자녀뿐이 아니었다. 윤영숙씨는 "돌아서면 잊어버리는데 왜 읽느냐고 하지만 콩나물이 떠올라요. 물이 다 빠지는 듯하지만 키는 크잖아요. 마찬가지로 제 지식과 지혜는 더 커진다고 생각해요"라고 말했다. 안애라씨는 "아이들 책을 읽으면서 우리 아이도 순간순간 참고 있을 수 있겠다, 우리가 더 잘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요"라고 했다.

독서회 어머니들은 조만간 '책 읽는 엄마가 좋다'란 이름의 1주년 기념 독서문집을 낸다. 거기에 실릴 글이다.

"우리들은 한 달에 두 번씩 학교를 찾았다. 우리에게는 방학도 없었다. 격주로 읽어 와야 할 도서를 정하고, 모두 책을 열심히 읽어왔다. 손에서 책을 놓은 게 언제였는지…. 오랜만에 책을 대하게 된 어머니들은 그저 책 읽기가 쉽지 않다는 말씀들을 내뱉기 일쑤였지만 지금은 아주 책 매니어(癖)들이 다 되신 것 같다."(안애라씨)

"(고2인 아들이 초등학생 때 권정생 시인의 '해바라기'를 갖고 동시 낭송대회에 참가했는데) 당시 아이가 고른 시도 아니고 아이의 느낌을 궁금히 여길 겨를도 없이, 나야말로 아이에게 겉만을 가르치고 주입.강요.연기를 요구했던 것은 아닌가 반성하고 있다. 오늘밤, 아이가 학교에서 돌아오면 그때 '해바라기'를 어떻게 이해하고 낭송했는지, 너는 그 시를 알게 돼 마음에 위로를 받았는지 물어야겠다. 공부하느라 피곤해 밤 12시쯤 집에 와도 엄마가 이것저것 물으면 귀찮아하기는커녕 '나는 엄마랑 얘기하는 게 좋다'며 식탁에서 미주알고주알 새벽 2시가 넘도록 이야기꽃을 피우겠지? 어서 밤이 되었으면 좋겠다." (류혜영씨)

글.사진=고정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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