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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학동산 중고 앰프 틀어놓고 … 춤추는 아프리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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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3면

5일 서울 중구 황학동 ‘OK 전자’에서 김창욱 사장과 나이지리아 출신 오디오 중개상 위케 치마 주니어가 중고 기기에 관한 대화를 나누고 있다. [김지은 인턴기자]

5일 오후 서울 중구 황학동 만물시장. 위케 치마 주니어(45·나이지리아)가 트럭에서 내려 들른 곳은 중고 음향기기를 취급하는 ‘OK 전자’였다. “이제 공구 같은 사업을 해보지 그래?” OK 전자 김창욱(60) 사장이 인사를 건냈다.

 “아니에요. 오디오 많이 필요해요.” 위케의 입에서 한국말이 튀어나왔다. 위케는 만물시장 일대를 돌며 음향 관련 기기를 사들여 나이지리아로 수출하는 일을 한다.

 “나이지리아 사람들은 음악을 들으면서 춤추는 거 좋아하는데 오디오가 많이 없어요. 만물시장이 꼭 필요해요.”

 황학동 만물시장에선 위케 같은 아프리카 출신 전문 중개상인(일명 ‘나까마’) 50여 명이 활동하고 있다. 이들이 시장에 처음 등장한 것은 2000년대 중반이었다. 영어강사·단순 노무자 등으로 한국에 들어왔다가 부업으로 황학동에서 중개무역을 시작한 게 시초다.

특히 나이지리아·남아공·탄자니아 등에서 “한국제품이 값도 싸고 품질도 좋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이들이 급격히 늘었다는 게 상인들의 얘기다.

 아예 본업을 접고 전문 중개상인의 길에 들어선 이들이 적지 않다. 이태원의 아프리카인 거주지 등에서 관련 정보를 듣고 황학동을 찾는 이도 있다.

 이들이 주로 거래하는 물건은 중고 오디오·TV·냉장고 등 가전제품들이다. 상당수 아프리카 국가들은 가전제품 수요를 해외 수입에 의존하고 있다. 가격이 저렴한 중국 제품이 주로 수입되지만 품질 문제로 중국제에 대한 불신이 크다고 한다. 상태가 비교적 양호하고 가격이 싼 중고 가전제품들이 유입되는 황학동이 아프리카 가전시장의 중요한 공급처가 된 까닭이다.

 ‘영창오디오’를 운영하는 주석완(57) 사장은 “나이지리아인들은 나이트클럽에 사용할 파워 앰프를 사가고, 라이베리아와 가나 사람들은 가정용·업소용 스피커를 주로 구입한다”고 말했다. 삼성 파브(PAVV)나 LG의 엑스캔버스(XCANVAS)는 아프리카 부유층들이 선호하는 제품이다.

또 ‘청계종합냉난방’의 한운용(65) 사장은 “더운 나라 사람들이라 그런지 설치가 간단하고 고장률이 낮은 창문형 에어컨이 잘 팔려나간다. 진동드릴이나 전기톱 같은 공구들도 인기”라고 전했다.

 중개상인들은 황학동에서 산 가전제품들을 모아뒀다가 1년에 2~3번씩 컨테이너로 물건들을 본국으로 보낸다. 사업자등록을 하지 않은 이들이 대부분이어서 엄밀히 말하면 불법이다. 주 사장은 “가나에서 온 수집상이 은행 거래는 절대 안 된다며 복대에서 달러 뭉치를 꺼내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란 적도 있다”고 했다.

 하지만 아프리카인들이 황학동 시장의 중요한 고객으로 떠오르면서 단속하기도 마땅치 않다. 서울시 최규해 민생사법경찰과장은 “신고가 들어오지 않는 이상 그들을 규제하기는 어렵다”고 설명했다. 최근 서울역사박물관은 황학동의 역사와 산업생태계를 조사한 ‘서울생활문화자료조사 보고서’를 발간하기도 했다. 황학동 일대 현지조사를 담당했던 서울역사박물관 정윤서 학예사는 “외국인 중개상과 LP열풍 등으로 황학동 시장이 다시금 활기를 띠고 있다”고 말했다.

◆황학동 만물시장=청계천 7가와 8가 사이 영도교 남쪽에 있다. 한국전쟁 직후 청계천변 고물상들이 황학동 주택가로 파고들며 형성됐다. 1960년대 가발 원자재인 머리카락 수집상들이 모이고 고서화 등 골동품들이 유통되며 호황을 맞았다. 가전제품은 1980년대 초 본격적으로 유입됐다. 외환위기와 청계천 복원 을 거치며 침체 를 맞았다. 현재 골동품 점은 10여 곳, 오디오·가전제품 상점은 40여 곳 있다.

장혁진 기자, 김지은 인턴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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