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설

불법 도청이 빚은 국정원 차장의 비극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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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이씨는 그동안 검찰 조사 과정에서 국정원의 불법 도청 사실은 물론 신건 전 국정원장의 증거인멸 시도 정황 등을 털어놓은 것으로 알려졌다. 그를 조사한 이후 검찰이 "의미 있는 진술을 확보했다"고 밝힌 적이 있기 때문이다. 특히 2차 소환 조사 후 신씨 측근과 통화할 때는 "많은 사람이 사실대로 진술했으므로 사실대로 말할 수밖에 없다. 더 이상 부인하는 건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려는 것"이라고 말했다는 것이다. 신씨 구속 직전에도 전화를 걸어 잘 모시지 못해 죄송하다며 울먹였다니 그가 얼마나 괴로워했는지 짐작할 만하다.

재임 중 막강한 권한을 누리던 정보기관 고위 간부들이 퇴임 후 시련을 겪는 것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문제는 이런 비극이 권위주의 시절에만 국한되지 않는다는 데 있다. 문민정부의 안기부장을 지낸 권영해씨는 대선자금 불법 모금 사건 등과 관련해 네 차례나 기소됐고, 국민의 정부 국정원장이던 임동원.신건씨도 최근 불법 도청 사건으로 구속됐다. 과연 이런 기관을 존립시킬 필요가 있느냐는 근본 물음이 제기된다.

정보기관 간부들이 수난을 겪는 가장 큰 이유는 권력자를 위해 그들이 정보기관을 불법으로 이용했기 때문이다. 정보를 무기로 권력자나 실력자에게 접근하고 그들의 환심을 살 정보를 수집하기 위해 전방위 불법 도청을 자행해 왔다. 그러다 보니 국가 정보기관이 권력자의 사설기관으로 전락해 버렸다. 본지 조사 결과 전.현직 국정원 간부들도 이를 가장 큰 문제로 꼽았다. 이런 비극이 되풀이되지 않도록 하려면 정치적 중립을 담보할 인사제도를 마련해야 한다. 그러지 않고선 불법 도청의 유혹도 뿌리뽑을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