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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 대통령, 중동 그랜드 디자인 나설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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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인택
채인택 기자 중앙일보 국제전문기자
채인택
논설위원

박근혜 대통령이 지난 1일부터 8일까지 순방 중인 쿠웨이트·사우디아라비아·아랍에미리트(UAE)·카타르는 한결같이 부자 산유국이다. 오일 달러를 바탕으로 탈(脫)오일의 신산업 발전을 추구한다. 그래서 한국과 경제협력을 할 게 많다는 게 청와대 측이 설명하는 순방 이유다. 청와대는 이번 순방을 통해 ‘제2 중동 붐’을 일으켜 보겠다는 의도를 숨기지 않는다. 특히 문형표 보건복지부 장관이 대통령 순방에 동행한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한국의 보건의료시스템이 복지 수요가 급증하는 중동에 본격 진출하는 상징적인 모습이기 때문이다. 특히 사우디로의 진출이 유망하다고 한다.

 그런데 사우디 왕실과 정부가 가장 공들이는 분야는 사실 복지가 아닌 안보와 보안 분야다. 살만 빈 압둘아지즈 알사우드(80) 사우디 국왕이 지난 1월 즉위 뒤 국방장관에 셋째 아들인 무함마드 빈 살만 알사우드(35)를 앉힌 것만 봐도 얼마나 안보에 노심초사하는지 짐작할 수 있다. 현재 전 세계에서 가장 젊은 국방장관이다. 나이를 떠나 절대적으로 믿을 수 있는 자식에게 국방을 맡기겠다는 의지가 묻어난다.

 살만 국왕도 2011년 11월부터 즉위 직전까지 국방장관을 맡았다. 사실 국방은 사우디 왕실의 최고 관심사이자 정부의 최우선 순위 정책 목표다. 예산이 이를 말해준다. 지난달 나온 영국 국제전략문제연구소(IISS) 정례보고서에 따르면 사우디는 지난해 808억 달러의 국방비를 썼다. 미국(5810억 달러)·중국(1294억 달러)에 이은 세계 3위다. 러시아(700억 달러)나 영국(618억 달러)보다 많다. 국제통화기금(IMF)에 따르면 2013년 사우디의 국내총생산(GDP)은 명목금액 기준으로 7480억 달러(세계 19위)로 1조3045억 달러(세계 14위)인 한국의 57% 수준이다. 그런데도 국방비 지출은 344억 달러로 세계 10위인 한국의 2.3배에 이른다.

 사실 사우디는 안보 불안 요인이 많기는 하다. 최근에는 이웃 이라크의 북부 지역을 장악한 극단주의 무장조직 이슬람국가(IS)에 신경을 곤두세운다. 이미 지난해 하반기 접경지역에서 IS 소행으로 보이는 공격을 받아 사우디군 3명이 숨지고 자살테러범 4명을 사살했다. 수도 리야드 부근에서도 IS 주도로 보이는 인질극이 발생해 경찰 1명이 목숨을 잃었다. 사우디로서는 적극적으로 대응할 수밖에 없다. 살만 국왕의 아들로 공군 조종사인 할레드 빈 살만 빈 압둘아지즈가 지난해 9월 미국이 주도하는 IS 공습에 참가해 시리아로 출격했을 정도다. 출격 뒤 사진이 언론에 공개되자 IS로부터 살해 위협을 받기도 했다.

 그러자 살만은 국방장관이던 지난해 9월 초대형 국방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이라크 국경을 따라 길이 1000㎞에 가까운 ‘2500리 장성’을 건설하는 사업이다. 침입자가 국경을 넘어오지 못하게 5중 벽을 가진 방호벽을 세운 뒤 20㎞마다 감시 레이더를 설치하고 벽에 감지 센서까지 부착해 물샐틈없는 감시망을 구축할 계획이다. 하늘에는 정찰기와 무인 감시기가 항시 떠 있게 된다. 여기에는 천문학적인 예산이 투입된다. 달리 보면 거대한 융·복합형 국방·보안 시장이 새롭게 열린 셈이다. 건설은 물론 국방과 IT 기술도 발달한 데다 60년이 넘는 DMZ 경계 노하우까지 보유한 한국이 충분히 노려볼 만한 시장이다.

 이뿐만이 아니다. 살만은 즉위 바로 다음날 보안과 대(對)테러 전문가인 조카 무함마드 빈 나예프 알사우드(55)를 왕위계승 서열 2위(Vice Crown Prince)에 올렸다. 사우디 보안을 책임지기 위해 오랫동안 길러진 인물이다. 미 연방수사국(FBI)과 영국 스코틀랜드야드(경찰청)에서 훈련받은 뒤 내무부에서 일하며 대테러 프로그램을 주도해 왔다. 주지사와 스페인 대사를 지낸 형 사우드를 제쳤다는 점에서 보안 전문가의 경력이 작용한 것으로 풀이된다. 한국은 보안과 경비 분야에서도 노하우가 있지 않은가.

 박 대통령이 귀국 뒤에도 사우디 왕실과 추후 논의할 아이템이 무궁무진하다. 일회성 순방에 그치지 말고 중동에 전략적으로, 장기적으로, 적극적으로 다가가는 그랜드 디자인에 나설 때다. 우리가 손쉽게 줄 수 있는 상품을 넘어 중동에서 애타게 원하는 재화와 서비스를 찾아서 창조해 제공해야 한다. 그게 창조경제 아닌가.

채인택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