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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러 막는 데 여야와 보수·진보가 따로 있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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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정철근 기자 중앙일보 에디터
정철근
논설위원

“이른바 여당이라고 하는 열린우리당 소속 의원들은 노무현 대통령의 의지와 정부의 뜻에 적극적으로 지지·동참해야 되는 것 아니에요? 어떻게 정반대가 되어서 대통령은 이런 법이 필요하다고 그러는데, 이른바 정신적 여당이라고 하는 의원들이 반대하면 대통령의 정책은 누가 서포트할 수 있는 거요?”

 2003년 11월 19일, 국회 법제사법위원회 회의장. 함승희 당시 민주당 의원이 목소리를 높였다. 함 의원은 정보위원회 소속이었으나 법안을 제안 설명하기 위해 이날 법사위에 참석했다. 테러방지법안은 닷새 전 정보위에서 여야 만장일치로 통과됐다. 2001년 9·11 테러 후 제출된 정부안을 국가인권위원회 주관 청문회 등을 거쳐 인권침해 소지 조항을 삭제한 수정안이었다. 하지만 법사위에 올라가자 일부 의원들이 제동을 걸고 나섰다. 가장 반대한 이는 천정배 열린우리당 의원이었다.

 천 의원은 대테러센터를 국가정보원장 밑에 둘 경우 인권침해나 권력남용의 위험이 있다고 주장했다. 대테러 활동을 위해 필요한 경우 특수부대의 출동을 요청할 수 있는 조항도 문제 삼았다. 그는 “계엄 선포 같은 국가적인 위난상황일 때만 군 병력을 동원하는 것이 아닌가”라고 따졌다.

 결국 이 법안은 이후 제대로 논의도 거치지 못한 채 16대 국회가 끝나면서 폐기됐다.

 9·11 테러는 미국은 물론 전 세계에 큰 충격을 줬다. 미국에선 애국법(USA Patriot Act)이 만들어졌다. 영국·프랑스·독일·캐나다에서도 반테러법을 통과시켰다. 영장 없이 테러 용의자를 구속하고 통화 내용을 감청할 수 있는 강력한 내용이었다. 일부 조항은 인권침해 소지도 있었다. 하지만 이들 국가의 의회는 유례없는 빠른 속도로 법안을 처리했다. 영국은 법안이 의회에 상정된 지 한 달 만에 국왕 재가를 받았고, 프랑스 의회는 불과 2주 동안 심의한 뒤 법안을 승인했다. 또 유엔테러방지위원회의 권고에 따라 인도·터키·필리핀·인도네시아 등 많은 국가가 테러방지법을 제정했다.

 그러나 대한민국 국회는 십수 년째 테러방지법에 대해 관심조차 보이지 않고 있다. 몇 개 테러 관련 법안이 발의되긴 했지만 국회에서 이를 놓고 진지하게 논의한 흔적도 찾을 수 없다.

 우리나라의 대테러 정책은 1982년 마련된 국가대테러 활동지침에 따르고 있다. 법률이 아니라 대통령훈령이라 힘이 떨어진다. 테러에 효과적으로 대응하기 어려운 상황이다. 88올림픽 유치를 계기로 만든 뒤 땜질식으로 개정해 국제화, 정보화, 첨단화되는 테러의 진화 속도를 따라가기엔 영 엉성해 보인다. 예를 들어 지침에는 테러가 발생하면 분야별로 사건대책본부를 두게 돼 있다. 교육과학기술부 장관은 방사능테러, 보건복지부 장관은 생물테러, 환경부 장관은 화학테러에 대한 사건대책본부를 설치·운영하는 식이다. 지난해 세월호 사고 때 봤듯이 이런 체제로는 대형테러에 우왕좌왕하다 속수무책으로 당할 게 뻔하다.

 마크 리퍼트 주한 미국대사를 피습한 김기종 우리마당 대표를 놓고 말들이 많다. 한쪽에선 종북세력을 배후에 둔 테러행위라 규정하고, 다른 쪽에선 한 외톨이 극단주의자의 일탈행동이라고 선을 긋는다.

 “테러는 정치적 상징효과를 얻기 위해 직접 피해자보다는 대중에게 심리적 충격을 가하려는 목적으로 이뤄진다.”

 미국 중앙정보국(CIA)은 테러의 정의를 이렇게 규정하고 있다. 한 개인의 테러행위도 국가와 사회에 큰 타격을 줄 수 있다. 공포를 극대화하려는 테러범의 의도가 먹히면 온 사회는 불신과 갈등에 휘말리게 된다.

 현재 이병석 새누리당 의원이 대표발의한 테러방지법안이 국회에 계류 중이다. 야권은 인권침해, 국정원의 권력남용 우려 등을 내걸어 반대하는 입장이다. 문제는 2003년 테러방지법 통과를 무산시킨 반대 논리에서 전혀 발전이 없다는 것이다. 테러방지법을 만든다고 모든 테러를 막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이슬람국가(IS) 관련 인터넷 사이트도 차단하지 못하는 현재의 허술한 대응 시스템을 그대로 둬서는 안 된다. 테러를 막는 데 여야와 진보·보수의 입장이 따로 있을 수 없다. 테러는 전 세계가 함께 대처해야 할 ‘공공의 적’이기 때문이다.

정철근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