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한책읽기] 니체의‘망치’ 는 무엇을 부쉈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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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4면

이제 우리는 동시대의 한국어로 공들여 옮긴 철학자 니체를‘주눅들지 않고’읽을 수 있게 됐다. 국내 중견 철학자들이 5년 간 공동작업한 니체 전집의 출간의 덕이다. 그렇다면‘망치를 든 철학자’니체가 겨냥한 것은 무엇인가. 주타격 목표는 이성 중심주의를 포함한 서구 지성사라는 견고한 성채다. 특유의 전복적 성격 때문에‘위험한, 너무나 위험한’사상가 니체는 미래철학의 모험을 시도하기도 했다. 오늘 한국 땅에서 그를 다시 읽는 이유는 그 때문이다. [편집자]

어떤 사상가의 '이름'이 그의 '사상'보다 훨씬 더 유명해서 참모습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온갖 편견과 이데올로기로 뒤덮인 덤불숲을 헤쳐 나가야만 하는 경우가 있다. 마키아벨리와 마르크스가 그렇지만, 니체만큼 신비에 휩싸인 사상가는 없을 것이다. 그의 사상에 혼란스러워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프리드리히 니체라는 이름은 여전히 많은 모험적 예술가와 사상가들의 가슴을 뛰게 만든다. 니체의 이름에 현혹되지 말고 그의 사상에 주목하라는 진지한 학자들의 경고는 별 효력이 없는 것처럼 보인다. 니체라는 이름은 여전히 다양한 사상을 잉태하고 있기 때문이다.

왜 지금 니체인가? 표면에는 모험과 다양성과 새로움으로 가득 찬 것처럼 보이지만 껍질을 한 꺼풀 벗기고 보면 모험보다는 안정, 다양성보다는 획일성, 새로움보다는 친숙함에 대한 욕구가 강렬한 이 권태의 시대에 왜 우리는 니체를 읽어야 하는가? 다양한 사상적 실험들이 시도되었던 지난 세기와 비교해보면, 21세기의 지성 세계는 그야말로 '죽은 사상가의 사회'다. 새로운 학파를 세울 수 있는 사상가는 보이지 않고 생명력을 상실한 수많은 이론들만이 떠돌아다닌다. 니체가 시대의 병으로 진단한 역사적 의식의 과잉이 창조적 사유를 죽인 것일까. 철학적 사유가 언제부터인지 이론의 문헌학적 체계화 및 박제화로 인식되고 있다.

그렇다면 이번에 책세상에서 번역하여 완간한 고증판 '니체 전집'(전21권) 역시 한 사상의 역사화에 불과한 것인가? 이 전집은 물론 서양철학이 이 땅에 들어온 이후 우리 전문가들에 의해 번역된 최초의 서양사상가 전집이기도 하지만, 니체 사상의 원형과 생성과정을 아무런 왜곡 없이 읽을 수 있게 되었다는 점에서 더욱 커다란 의미를 지닌다. 나를 포함한 정동호 교수, 김정현 교수, 백승영 전임연구원으로 구성된 전집편집위원회가 처음 작업을 시작하였을 때에는 오직 제대로 된 니체 전집 하나 내보자는 생각뿐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문득 이런 생각이 든다. 우리가 처음 갖게 된 서양 사상가의 정본 번역 전집이 왜 니체전집인가? 우연의 일치인지는 모르지만, 특별한 의미가 있는 것은 아닐까?

니체는 분명 파괴와 창조의 철학자이다. 니체는 자신처럼 사유하는 사람에게는 스스로를 파괴할 위험이 항상 가까이 있다고 고백한다. 그는 기존의 가치를 전복하고 새로운 가치를 창조하려고 하였다. 그렇지만 니체가 말하는 것처럼 춤추는 별을 잉태하려면 자신의 내면에 여전히 혼돈을 갖고 있어야 하기 때문인지 그의 사상은 여전히 우리를 혼란스럽게 만든다.

니체는 어떤 사람들에게는 그들이 내줄 수 있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을 원하고, 또 어떤 사람들에게는 그들이 감당할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준다. 전자의 사람들은 의구심을 가지고, 후자의 사람들은 열광한다. 어떤 사람들에게는 전통적 가치를 철저하게 해체하는 사상가 니체가 너무 위험하고, 어떤 사람들에게는 새로운 가치를 창조하는 예술가가 되라는 니체의 심미학적 요구가 너무 모험적인 것이다.

우리가 지금 '위험한, 너무나 위험한'사상가 니체를 읽어야 하는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다. 니체는 근본적으로 미래철학의 모험을 시도하고, 이를 위해 자신의 작품을 '온 몸과 삶'으로 쓰기 때문이다. 우리가 미래의 철학을 가지고 있지 않을 뿐만 아니라 철학을 필요로 한다면, 니체는 세 가지 관점에서 여전히 읽을 가치가 있다.

우선, 니체는 서양의 이성중심주의를 해체함으로써 새로운 이성이 발견될 수 있는 영토를 개척하였다. 서양이성에 대한 철저한 비판이 결국 이성마저 공동화시킬 수 있다는 비판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이성과 감성, 담론과 직관의 관계를 재정립해야 한다는 그의 주장은 타당하다. 포스트모더니즘의 거품이 꺼지고 난 뒤에도 니체의 이름이 여전히 빛나는 것은 그의 작업이 근본적으로 '모든 가치의 뒤집기'이기 때문이다.

다음으로, 니체는 삶과 사상이 구별되지 않는 사상가이다. 자신이 살고 있는 그대로 사유하고 동시에 사유한 것을 살아가는 사상가 니체는 21세기가 불모(不毛)의 시대임을 폭로한다. 니체는 "인간이 왜 있는가는 중요하지 않다"고 말하면서 "네가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가?"라고 우리에게 묻는다. 우리가 그로 인해 몰락할 수 있는 높고 고귀한 목표를 스스로 설정하고자 한다면, 니체는 여전히 우리를 유혹한다.

끝으로, 디오니소스의 철학자 니체는 우리가 중심을 찾는 한 끊임없이 만들어지는 타자(他者)에 주목한다. 정신에 대한 몸, 이성에 대한 감성, 남성에 대한 여성, 인간에 대한 자연. 이들이 여전히 우리의 문제라면, 니체는 동시대의 철학자이다. 니체는 물론 다양한 가면을 쓴 철학자이다. 그가 신비로운 것은 그의 사상이 하나의 이론으로 체계화될 수 없을 정도로 다양하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의 연구도 이제는 니체의 모습을 다양하게 보여주고 있다. 이 전집이 더 많은 모험가를 유혹하길 기대해 본다. 왜 지금 니체인가? 우리에겐 철학이 여전히 필요하기 때문이다.

이진우 교수(철학.계명대 총장)

5년 걸린 ‘책세상’ 전집 21권
유고집 12권은 국내 처음 번역
‘초인’대신 원어 ‘위버멘쉬’써

20세기를 코 앞에 두고 타계한 독일 출신의 철학자 프리드리히 니체(1844-1900)가 21세기 세계에서 부활하고 있다. 19세기의 한 복판을 살았던 그는 21세기를 앞서 사유했기 때문이다. 그의 선진성은 광기(狂氣)로 폄하돼기도 했으며, 나치즘을 예비한 철학자라는 오해를 받기도 했다. 그가 되살아나기 시작한 것은 20세기 후반 프랑스 현대철학자들에 의해서였다. 들뢰즈, 데리다, 푸코 등은 니체를 탈근대주의(포스트모더니즘)의 기반을 놓은 현대 철학자로 재평가했다.

'니체 다시 읽기'는 프랑스를 넘어 전세계로 확산됐다. 한국 학계와 출판계도 이런 흐름에 뒤지지 않는다. 최근 책세상 출판사가 내놓은 '니체 전집'의 경우 21권의 방대한 분량이다. 니체 관련 저작 출판의 결정판이라할 만한 작업이다. 이 전집은 니체 정본으로 평가받는 독일 발터 데 그루이터사가 펴낸 '니체비평전집'을 완역했다. 그동안 번역된 적이 없던 니체의 유고집이 12권이나 포함된 것도 자연스럽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등 대표작은 재번역했다.

국내에는 니체 전집이 두 차례 출판돼 니체 붐을 이끈 바 있다. 1969년 휘문출판사가 국내 처음으로 니체전집(전5권)을 출간했고, 이어 82년에 청하출판사에서 두 번째로 니체전집(전10권)을 펴냈다. 순서로 보면 3번째인 책세상판은 기존 번역의 오류를 바로잡았다. 국내 니체 번역의 가장 큰 오류는 '초인'(超人)이란 용어. 모더니즘이 절대성을 강조했다면, 포스트모더니즘은 상대성과 차이를 내세운다. 절대성의 정점엔 서양의 하느님(神)이 존재한다. 니체는 그 신을 부정했다. 그것은 2000년 넘게 쌓여온 서양 형이상학 전통을 부수는 망치질이었다. 나아가 신으로 대표되는 기성 체제에 대한 비판을 내포하고 있다.

책세상판은 '초인'의 원어였던 독일어'위버멘쉬'(?bermensch)를 그대로 사용했다. 신을 부정한 니체에게 초월성의 의미가 강한 '초인'은 부적절한 언사였기 때문이다. '위버멘쉬'는 형이상학적 미몽에 쌓인 기존의 인간을 넘어서는 새로운 인간형이라는 뜻으로 니체가 만든 말이다. '권력에의 의지'라 했던 기존의 번역도 '힘에의 의지'로 수정했다. 독일어 '마흐트'(Macht)는 니체에게 자연 전체를 지배하는 힘을 가리키는 용어였기 때문이다.

편집위원으로 정동호(충북대, 위원장).이진우(계명대).김정현(원광대) 교수와 백승영(서울대 철학사상연구소) 박사가 참여해 5년 넘게 진행된 완역 작업을 이끌었다.

배영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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