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과학칼럼

죽음과 장애의 의학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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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우리의 고령화 속도는 세계에서 가장 빠르다. 의료의 발전으로 과거 같으면 사망했을 환자가 장애를 가지고 사는 경우가 많아졌다. 이미 고령화된 사회의 의료 목표는 단순한 수명 연장보다는 육체적.정신적, 그리고 사회적으로 건강한 노년기다. 장애가 있어도 밝게 살 수 있도록 하고, '편안한' 죽음을 맞지 못하고 주변과의 교감을 상실한 채 '질긴' 생명의 끈에 매달려 환자 본인과 가족이 괴로움을 겪는 경우를 줄여 보자는 것이다.

삶의 가치, 활동의 가치가 중요하듯이 죽음과 장애의 가치도 중요하다. 장애가 가정 파탄의 불씨가 되기도 하지만 가족 구성원 간 사랑의 촉매가 되기도 한다. 사람이 선택할 수 있는 여지는 많지 않지만 우리 모두 겪을 죽음도 그 모습이 역시 다양하다.

죽음에 있어서 사회적으로 공유해야 하는 가치가 있어야 하는 한편 건강한 판단에 의거한 개인적 가치판단도 존중받아야 한다. 여러 선진국에서처럼 사회적으로 인정하는 범위 내에서 개인은 자신이 치료받을 범위와 내용을 스스로, 또는 자신을 사랑하는 책임 있는 보호자로 하여금 정하게 하여 스스로의 존엄성을 유지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식물인간 상태 환자의 연명에 관한 세계적 논란과 최근 교황의 존엄을 잃지 않은 죽음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장기이식술과 줄기세포치료 등 의학의 발전은 우리의 생명 모래시계에 더 많은 재충전을 예고하고 있다. 자연히 장애와 질병을 가지고 생존하는 사람들은 많아질 수밖에 없고 연명술의 발전은 죽음의 문전에서 진퇴양난의 상황도 연출한다.

얼마 전 회복 가능성이 매우 낮은 환자의 보호자가 의료진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퇴원을 고집해 환자를 퇴원시킨 후 이 환자가 사망하여 의료진이 살인방조죄, 보호자가 살인죄로 판결받은 일이 있다. 법원은 의료진이 윤리위원회 등 심사숙고의 절차를 밟지 않았음을 문제로 삼으면서도, 의료진에 대해 절차의 문제가 아닌 살인방조의 차원에서 판결했다. 당시 회복 가능성에 대한 판단도 의료인이 아니고 법원에서 내린 셈이었다.

뇌사가 아닌 이상 생존 가능성을 0%라고 단언할 수 있는 경우는 없다. 회복 가능성에 대한 최종적 판단을 법원이 하는 상황에서, 여러 전문가가 모여 합의한다고 하여 스스로의 살인방조와 보호자의 살인행위가 허용될는지 혼란스럽다. 자연히 의료진은 환자의 사망까지 최대한 연명치료를 시행하며 방어적으로 진료를 행하게 되었다. 언뜻 생명 존중의 최선으로 보일지 모르지만 심층적으로 그렇게 단순하지만은 않다.

의학은 생물학적 지식과 기술을 바탕으로 하는 학문이다. 그러나 의료의 목표가 생물학적 수준에 머물지 않고 행복감 증진에 있다면 의학이 인문사회학적 요소를 많이 포함하는 것은 당연하다. 의학은 인간의 건강한 삶과 활동을 추구하지만 아울러 건강한 장애와 죽음도 추구한다. 우리 사회 여러 분야의 협력을 통해 장애와 죽음의 의학을 인도해 주기 바란다.

왕규창 서울대 의대 학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