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는부산APEC] "개혁·개방은 자기 사정에 맞게 해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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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구 8300만 명의 베트남은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21개 회원국 중 중국에 이어 둘째로 높은 경제성장률을 보이고 있는 나라다. '과거는 덮고 미래를 본다'는 슬로건 아래 1986년부터 추진해 온 베트남식 개혁.개방정책(일명 도이머이 정책)의 결실이다. '베트남 변혁'의 총설계사인 쩐 득 르엉(68) 국가주석이 APEC 정상회의 참석에 앞서 중앙일보와 회견을 했다. 르엉 주석이 외국 언론과 직접 회견한 것은 처음이다. 인터뷰는 15일 베트남 수도 하노이 시내 주석궁에서 이뤄졌다. 베트남은 내년도 APEC 개최국이다.

-중국의 개혁.개방정책과 베트남 개혁.개방정책의 차이점은 무엇인가. 북한이 개혁.개방을 한다면 어떤 모델이 적합하다고 보는가.

"중국의 개혁.개방은 70년대 말 시작됐고, 베트남은 그보다 늦게 시작됐다. 사회주의 체제를 유지하면서 시장경제를 채택한 것이 양국의 공통점이다. 그러나 경제 규모가 서로 다르기 때문에 세부적인 개혁.개방 일정이나 내용은 다를 수밖에 없다. 중국 경제는 거대해서 세계 경제를 생각하면서 개혁.개방을 추구하겠지만 베트남 경제는 아직 규모가 작다. 또 제도가 정착되지 않아 여러 가지 시행착오를 겪고 있다. 그러나 어느 모델이 더 낫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개혁과 개방은 각자 자기 사정에 맞는 방식으로 이뤄져야 한다."

-베트남은 지리적으로 인도차이나 반도에 위치해 있다. 또 동남아국가연합(아세안) 회원국이다. 그러나 역사적으로는 중국 등 동북아와 깊은 관계를 맺어 왔다. 베트남은 동남아와 동북아 중 어느 쪽에 더 가깝다고 느끼는가.

"베트남은 문화와 역사적 측면에서 오랜 세월 중국.일본.한국 등 동북아 국가들과 밀접한 관계를 맺어 온 게 사실이다. 그렇다고 남서쪽 국가들과 교류를 안 했다는 뜻은 아니다. 지금은 동남아 국가들과도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 따라서 어느 쪽에 더 가깝다고 단정적으로 말하기는 곤란하다."

-베트남 경제가 급속도로 성장하면서 빈부 격차가 심각한 사회 문제로 대두되고 있다. 사회주의 체제 하에서 빈부 격차가 갈수록 커지는 이 모순을 어떻게 극복할 수 있는가.

"베트남식 개혁.개방정책의 핵심은 사회주의적 시장경제다. '사회주의적'이라는 말은 모든 정책을 사람, 즉 국민의 입장에서 추진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경제 발전 과정에서 빈부 격차는 불가피한 측면이 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각종 제도적 장치를 마련하고 있다. 베트남은 유엔에서 모범적인 경제 발전 모델로 소개되기도 했다. 빈부 격차 문제를 해결할 자신이 있다."

-베트남은 세계무역기구(WTO) 가입을 추진 중이다. WTO 가입은 글로벌 경쟁체제에 본격 편입된다는 의미다. 사회주의적 시장경제와 WTO 가입 사이에 갈등 요소는 없다고 보는가.

"거듭 강조하지만 베트남의 개혁.개방정책은 그 혜택이 모든 국민에게 골고루 돌아가는 시장경제 체제 구축을 목표로 하고 있다. WTO 가입도 같은 맥락에서 추진되는 것이다. 따라서 둘 사이에 모순이나 갈등이 존재할 것은 없다. 다만 아직 베트남 경제가 취약하기 때문에 선진국과의 경쟁에서 어려움이 있을 수는 있다. 법률과 제도상 허점도 많다. 하지만 단기간에 다 해결할 수는 없다. 당장은 힘들 수도 있지만 장기적 관점에서 보면 WTO 가입은 베트남 경제의 내실을 다지는 데 도움이 될 것으로 확신한다."

-조류 인플루엔자(AI)로 전 세계에서 60여 명이 사망했는데 그중 40여 명이 베트남 사람이다. 특단의 대책이 있는가.

"AI는 베트남만의 문제가 아니고 세계적인 문제다. 우리는 이에 대처하기 위해 총리 산하 특별대책반을 가동하고 있다. AI가 발생하면 곧바로 신고하고 방역하는 체제도 갖췄다. 이번 부산 APEC에서도 이 문제가 심도있게 논의될 것이다. 문제는 계획이 아니라 행동이다."

-한국과 베트남 관계를 어떻게 보는가.

"2001년 양국 관계는 '21세기 포괄적 협력 관계'로 발전했다. 베트남은 한국과의 관계를 단순한 협력 관계가 아니라 전면적 협력 관계로 발전시키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이를 위해 앞으로 양국 간 교류를 국회.문화단체.청소년 등 각 분야로 전면확대해 나갈 방침이다. 경제분야에서는 에너지.정보기술(IT).기계.광산개발.수출용 농수산 양식.가공처리.섬유봉제.가죽신발 등 8개 부문의 협력을 강화할 계획이다."

-APEC이 선진국들만의 잔치라는 비판이 있는데.

"APEC은 회원국 간 공동 관심사를 논의하고 해결책을 모색하는 일종의 포럼이다. 이번 부산 회의에서는 역내 무역분쟁과 AI 등 국제적 현안 해결을 위한 '부산 로드맵'이 마련될 것이다.그러나 베트남과 같은 개도국의 경제력을 키우기 위한 협력이 부족하다고 본다. 이 문제 해결을 위해 역내 무역과 투자 자유화 지역 창설을 제안하고 싶다."

-APEC 개최 준비는 잘돼 가고 있는가.

"이미 준비위원회가 발족됐다. 베트남은 큰 국제행사를 성공적으로 개최한 경험을 갖고 있다. 예컨대 지난해 '아셈(ASEM)+5' 국제회의도 성공적으로 치렀다. 국제사회도 이 같은 베트남의 능력을 인정하고, 내년도 APEC 개최지로 베트남을 선택했다고 본다."

-한반도 통일을 위해 가장 필요한 것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나.

"통일을 위해 가장 중요한 것은 남북 간의 지속적인 대화와 교류라고 생각한다. 한국이 원한다면 베트남은 한반도 평화와 통일을 위해 어떤 역할도 할 용의가 있다. "

-하노이에서는 맥도널드 햄버거 가게를 볼 수 없다. 미국과의 화해는 완전히 끝났는가.

"이제 양국 관계에는 아무 문제가 없다. 95년 국교가 정상화됐고, 2000년에는 양국 투자협정서까지 교환했다. 베트남에서는 맥도널드 햄버거뿐 아니라 코카콜라도 찾아보기 힘들다. 베트남 사람들이 미국을 싫어해서가 아니라 베트남 소비자들의 입맛에 맞지 않기 때문일 뿐이다."

-한국 드라마를 본 적이 있는가.

"물론이다. 한국 드라마를 아주 좋아한다."

정리=하노이 최형규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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