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해를 마감하는 길목에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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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9면

마지막 한장 남은 달력을 쳐다보며 마치 초읽기에라도 몰린듯이 조바심나는 마음의 맥박소리를 듣는다.
한해를 마감하는 길목에 들면 나를 돌아보고 잘못한 일과 못다한 일들을 반성하는 여유등을 가질 나인데,흐른다기보다 곤두박질치는 시간속에서 스스로의 몸과 마음을 가누지못하면서 세상일을 탓한다는 것부터가 부끄럽고 어줍짢은 일이 아닐수 없다.
벌써부터 징글벨이 울리고 구세군의 자선남비를 거리에서 마주칠 터인데 나와 함께 사는이땅의 어렵고 불우한 사람들을 위해 내가 할수있는 일이없는것이 또한 나를 괴롭힌다.
올해엔 사뭇 천문학적인 규모의 대기업들이 도산해서 가뜩이나 허리띠를 죄며 사는서민들의 어깨를 더욱 오그라들게했다.
도시.몇백억원이다,몇천억원이다 하는 액수는 추상적이고 관념적인 것이어서 실감이 나지않지만 몇십만원 안팎의 월급봉투로 적금을 붓고 가계부를 쓰고 내집장만의 꿈을.키우는 착하디 착한 우리 이웃들에게는삶의 가치기준을 한꺼번에 뒤짚어 엎는 일이기도하다.
그런데 어찌된 일일까? 우리사회는 언제부터인가 자기본위외 삶과 이기심의 팽창으로
가진자와 못가진자,있는자와 없는자의 차등을 드러내고 그로해서 국민 서로의 불신과 괴리를 빚고있다.
연말연시를 조용하게,가족과함께라는 표어는 멀리하고 벌써부터 관광휴양지의 숙박업소는 예약만원이 됐다는 얘기고보면 이제 우리나라도 선진국대열에 끼여서 마음껏 쓰고 먹고 노는 소비가 미덕인 시대에 와 있구나하는 안도감을가져야할지,아니면 자기 분수를 못차리는 사치·허영풍조의 만연인지 분간이 서질 않는다.
지난10월 이른바 황금연휴때 내가 일하는 회사에서 무슨 전시행사를 가겼는데 모두들 입을 모아 어쩌자고 연휴때 전시를 하느냐고 걱정했을때 나는 연휴때니까 전시장 구경도 하는 시간이 있지 않겠느냐고 응수했었다.
그런데 결과는 역시 고객이될만한 사람들은 모두 설악산이다,제주도다,내장산이다 빠져나가고 없었다.변해도 많이변한 세상이구나 하고 느꼈을때는 이미 늦었였다.
불과 10여년 전만해도 없었던 바캉스란 말이 나으면서 여름철 한때의 바닷가가 도시를 이루더니 이제는 봄·여름·가을·겨울, 연말연시등 시도 때도 가리지 않고 행락인파가 산과 들이 있는곳에 끊이지않는다.
자연을 찾아 잠시라도 몸과 마음의 쉴곳을 찾아야하는 현대인들의 숨막하는 생활을 먼저 이해해야겠지만 나혼자만의 삶이 아닌 공동체의 삶을 생각할때 오늘의 우리사회에 일어나는 불균형스러움과 그로인해 틈이 벌어지고 마침내는 행복할수 있는 사람들의 행복마저도 깨뜨러지지나 않나 하는 걱정스러움이 앞서는 것이다.
명절때가되면 어른을 찾아 뵙고 이웃간에 떡이라도 나눠먹는 우리네 미풍양속이 현대에와서도 이어지고 있음은 흐뭇한 일이나 연말연시를 틈타서 지나친 허례허식이 무성하고 정의의 한계를 넘어선 금품의 왕래가 심해긴것도 오늘의 현실이다.
과경은 비례라는 말도 있지만 그런 금품이 불우한 사람,가난한 사람들에게 가는 것이아니고 오히려 고누거각에 사는 가진자, 있는자에게 가는 것이라면 신호등이 잘못 켜진것이라고 밖에는 달리 생각할 수 없다.
몹시도 어려웠던 한해다.KAL기 피격에 이어 아웅산폭발사건등 우리역사에 다시는 없어야할 .일들이 일어난 한해다.또한 저 이산가족들의 상면장면앞에서 우리는 얼마나 울고 웃었는가.
모두가 님의 일일수없는 나와 우리의 일이었기에 그 상처들은 아직도 가슴에서 선연히 피로 괴어있다. 그 사람이 산다는 것이 주인공이 되면 비극이고 관객이 되면 희극이라고 했지만 지금 세계는 약육강식의 싸움에 힘없는 나라,힘없는 겨레의 설땅을 잃어가고 있다.
지구의를 놓고 눈씻고보아야 되는 한반도, 그나마 두쪽으로 갈라진 이나라,기름한방울 나지 않는 자원 빈곤의나라,서로 부추기고 밀어주고 손에 힘을 모으지 않으면 살수없는 이겨레,다른 때는 말고라도 한해가 가는 세밑 끝에서 나만의 삶이 아닌우리 모두의 삶을 돝이져볼일이다.
교복자유화와 두발자유화에 얹혀 한결 더 심각해진 청소년문제, 생활고 때문이 아니고 유흥비 때문에 일으키는 강력사건,이모두를 끌어들이는 것이 분수와 자각을 차리지 못하는 무분별한 행동때문이 아닌가.
더욱 지도층에 있는 이른바지성인들의 의식이 현실감을 상실하고 불감증이 되어서 놀고즐기는 일에 낭비하고 탐닉하는 풍조는 없는지,올해의 세밑만은 나보다 어렵게 사는 사람들의 머리맡에 촛불하나를 켜놓는 마음을 모두가 가지기를바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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