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선지 루트 1만km] 15. "고구려 후예여, 그를 기억하라"(끝)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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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선지의 전투를 계기로 중국과 서방이 중앙아시아 지역에서 만났다. 고선지는 당나라의 영화를 위해 싸웠지만 동시에 고구려인의 긍지를 드높이며 동서문명이 교류하게 했던 세계사적 인물로 기억돼야 할 것이다. 그의 숨결이 녹아있는 고선지 루트 초원의 길을 말을 탄 두 소년이 손을 흔들며 지나고 있다. 조용철 기자

이제 일정의 마지막 코스인 카자흐스탄으로 간다. 한 달간의 고된 여정이었다. 우즈베키스탄을 넘어 카자흐스탄으로 들어서자 중국 서북지방에서부터 뻗어온 톈산(天山)산맥이 도로 우측으로 우리 일행과 함께 달렸다. 카자흐스탄은 반사막성기후라 목축과 농업이 동시에 행해지는 지역이다. 우즈베키스탄에 고려인 20만명이 살고 있듯이, 카자흐스탄에도 고려인 10만명이 살고 있다. 20세기 초 러시아 연해주에서 강제이주한 이들이다.

알마티로 가는 도중에 타라스(Taraz)를 지났다. 탈라스 전투가 벌어진 지역이 어디냐에 대해선 현재 두 가지 설이 존재한다. 하나는 지금 우리가 지나는 카자흐스탄의 타라스이고, 다른 하나는 우리가 지나왔던 키르기스스탄의 탈라스강 유역이라는 설이다. 중앙아시아의 키르기스스탄과 카자흐스탄 일대에서 탈라스 전투가 벌어진 것은 확실한데 정확한 지점을 확정할 수 없는 것이다.

타라스시와 탈라스강을 포함하고 있는 키르기스스탄-우즈베키스탄-카자흐스탄은 지금 모두 이슬람 국가다. 고선지가 활약할 당시엔 그렇지 않았다. 불교와 기독교 세력이 우세했다. 이슬람문화는 고선지가 탈라스 전투에서 패배한 뒤 이 지역에 광범위하게 퍼지게 됐다. 이후 중국이 이 일대에 영향력을 행사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고선지가 이 일대의 지배권을 장악함으로써 당나라는 영화를 누릴 수 있었지만, 고선지의 패배 이후에 당나라의 운명도 내리막길을 걸었던 것이다.

하지만 어느 일방의 승리나 패배가 아니라 문명의 교류라는 관점으로 역사를 조명해 보면 달라진다. 고선지는 중국과 서역이 중앙아시아 지역에서 만나 서로의 문화를 주고받는 문명 교류의 역사적 계기를 만든 주역이었다. 우리는 그 점을 중시한다. 고선지 루트를 중국과 중앙아시아에 국한시키지 않은 것은 그 때문이다. 고선지 루트를 한반도에서 중앙아시아에 이르는 1만㎞로 확장시킨 것이 이번 여정이었다. 고선지 루트는 전투의 길만이 아니었다. 수많은 상인과 종교인이 넘나들던 교류의 길과 일치한다. 그들은 자신들의 문화를 들고 이 길을 오갔다. 우리는 한반도와 중앙아시아를 넘어 유럽으로, 아메리카대륙으로 뻗어나가며 다시 한반도로 이어지는 지구촌 역사와 문화 교류의 한마당이 펼쳐지길 기대한다. 그같은 교류와 순환의 고리 역할을 한반도가 할 수 있기를 희망한다. 1300년 전 고구려 유민 출신의 고선지가 자신의 한계를 극복하고 말을 타고 유라시아 일대를 훨훨 휘젓고 다녔듯이.

카자흐스탄 국립동양학연구소에서 만난 아리셰르 아키세프(종교문화학과 박사) 교수는 고선지에 대해 "중국인을 탈라스 주위로 이주시켜 새로운 마을을 만들어 중국을 확대한 인물"이라고 평가했다.

중국의 외연을 서쪽으로 넓히며 결과적으로 제지술의 서양 전파 등 동서 문명 교류에 이바지한 고선지였지만 그의 최후는 비참했다. 국제 전쟁에서 빛나는 성과를 올렸음에도 불구하고 엉뚱하게 내란을 진압하는 과정에 누명을 쓰고 처형당했다. 751년 탈라스 전투에서 패배한 뒤 고선지는 현직에서 물러나 있었다. 그러던 중 755년 안록산의 난이 벌어지자 당 현종은 고선지를 다시 불러 반란군 진압 사령관에 임명한다. 진압 작전을 수행하던 고선지 장군은 안록산 군대의 진로를 다른 곳으로 돌리려는 의도로 작전상 퉁관(潼關)까지 후퇴하였다. 이같은 전술이 그를 옭아매는 족쇄가 될 줄 꿈에도 몰랐다. 반란군의 제1차 퉁관 공격을 저지했음에도 당 조정은 고선지가 퉁관으로 후퇴한 것은 황제의 명을 거역한 것이라는 죄목을 씌워 처형하고 만다. 그가 죽고나서 얼마 지나지 않아 퉁관과 장안이 반란군의 수중에 들어가고 당나라는 급속히 몰락하게 된다.

고구려인의 후예로 노예의 신분에서 출발한 고선지는 중국의 황족이나 될 수 있는 최고의 지위에까지 올랐었다. 그가 당나라의 영화를 위해 온 몸을 바친 것만은 아닐 터이다. 고구려 후예의 긍지를 드높이면서 문명의 발전적 진화에 이바지한 세계사적 인물로 기억되어야 할 것이다. 그가 죽은 지 1250년이 지난 지금, 그의 개척정신은 '21세기 신실크로드'를 열어가야 할 우리의 귀감이다.

김주영(소설가).지배선(연세대 역사문화학과 교수)
사진=조용철 기자 <youngcho@joongang.co.kr>

<고선지 연보>

출생년 미상. 700년 전후 추정. 베이징 부근서 고구려 유민 고사계의 아들로 태어남

720~744년 안서(오늘날 신장성 일대) 지역에서

유격장군으로 활동

744년 우전(타클라마칸사막 남쪽.오늘날 호탄) 진수사에 임명. 토번을 진압하는 큰 공을 세움

745년 언기(오늘날 카라샤르) 진수사에 임명

서역에서 장안으로 가는 비단길 지배권 확보

747년 토번 연운보와 소발률국 잇따라 정벌

12월 안서절도사에 임명

750년 석국(오늘날 타슈켄트) 정벌

751년 탈라스 전투에서 패배

755년 밀운군공 작위 받음. 안록산의 난 발발

12월 퉁관(潼關)에서 안록산 반군 저지

황제의 명령을 어겼다는 터무니없는 죄목으로 처형 당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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