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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진핑 시대의 신도광양회 전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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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상철 기자 중앙일보 중국연구소장 · 차이나랩 대표
[일러스트=김회룡]
유상철
중국전문기자

화술의 달인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은 중국과 대화할 때 곧잘 중국 고전의 경구나 유명인의 말을 인용한다. 중국에 대한 존중의 뜻으로 비춰져 중국인의 마음을 쉽게 살 수 있기 때문이다. 지난해 11월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 참석차 베이징을 방문했을 때도 두 번이나 덩샤오핑(鄧小平)의 실사구시(實事求是) 정신을 언급했다. 미·중 관계는 현재 협력하고 있다는 사실에서 출발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한 것이다.

 오바마는 덩의 1979년 방미가 미·중 관계의 주춧돌을 놓았다는 말을 자주 한다. 덩은 방미 기간 카우보이 모자를 쓰고 농구를 관람하는 등 여느 미국인과 같은 행동으로 미국의 마음을 샀다. 그 결과 중국이 지난 30여 년간 미국의 견제를 받지 않고 미국이 만들어 놓은 국제질서 안에서 마음껏 발전을 구가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오바마의 말에는 중국이 아직도 덩의 가르침을 따라야 할 것이란 시사가 깔려 있다. 미국에 도전하려는 중국에 점잖게 훈수하는 의미를 지녔다.

 그래서인가. 최근 시진핑 시대의 중국 외교가 덩의 도광양회(韜光養晦) 정책을 새롭게 포장한 신(新)도광양회 전략을 펴고 있다는 주장이 국내 학계에서 제기돼 눈길을 끈다. 얼마 전 본지 후원으로 열린 제1회 아주대 중국정책연구소(소장 김흥규) 세미나에서다. 도광양회 정책은 냉전이 끝나가던 90년대 초 나왔다. 내부적으론 89년 천안문(天安門) 사태, 외부적으론 동구 사회주의권 붕괴란 격변을 지켜보며 덩은 28자 방침을 제시했다.

 ‘냉정하게 관찰하고(冷靜觀察) 진영을 공고히 하며(穩住陣脚) 침착하게 대응하되(沈着應付) 능력을 감추고 때를 기다린다(韜光養晦). 자세를 낮추고(善于守拙) 우두머리가 되지 않으며(決不當頭) 해야 할 일은 한다(有所作爲)’. 흔히 도광양회로 대표되는 이 외교 전략을 바탕으로 중국은 오로지 경제 건설에만 매진한 결과 영국·독일·일본 등을 잇따라 따돌리고 이젠 미국과 함께 G2로 올라섰다.

 국력이 커지자 중국의 콧대가 세졌다. 특히 2008년 뉴욕발 금융위기로 미국이 약세를 보이면서 중국이 미국 주도의 국제 질서에 도전하는 일이 많아졌다는 평가가 나왔다. 중국이 달러 대신 국제통화기금(IMF)의 특별인출권(SDR)을 기축통화로 사용하자고 제안한 것 등이 그런 예다. 시진핑의 집권 이후 중국의 목소리는 더 커진 듯했다. 시진핑은 아시아인프라투자은행(AIIB) 건설에 나섰고 아시아 안보는 아시아인이 지키자는 아시아 신안보관도 제창했다. 덩의 도광양회는 먼지 속으로 사라진 듯했다.

 한데 지난해 11월 APEC 개최 시점을 전후로 중국이 다시 도광양회 전략을 끄집어내 손질하고 있다는 게 김한권 아산정책연구원 지역연구센터장의 주장이다. 지난해 12월 중순 미 시카고에서 열린 미·중 통상무역합동위원회(JCCT)에 참석한 왕양(汪洋) 부총리는 “세계를 주도하는 건 미국이다. 중국은 미국 주도의 세계질서를 존중한다”고 말했다. 그것도 모자랐는지 다시 “중국은 미국에 도전할 의지도 능력도 없다. 미국의 주도적 위치를 존중한다”고 천명했다.

 새해 들어선 중국 유명 학자들의 엄호 사격이 이어졌다. 진찬룽(金燦榮) 런민대 국제관계학원 부원장은 지난달 10일 중국은 계속 낮은 자세의 외교를 펼칠 것이라고 말했고 그 이틀 뒤엔 자칭궈(賈慶國) 베이징대 국제관계학원 원장이 나서 중국은 기존 국제질서에 도전할 의사가 없다고 밝혔다. 친야칭(秦亞靑) 외교학원 원장은 중국의 외교가 강경하게 변했다는 말이 있지만 중국은 기존 외교 전략을 2050년까지 유지할 것이라고 밝혔다. ‘기존 전략’은 덩의 도광양회 전략으로 이해되고 있다.

 중국은 왜 갑자기 도광양회로 돌아서는 것일까. 국제환경이 변하고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미국과 중국은 서로에 대해 자신감을 갖고 있다고 한다. 미국은 경기만 회복되면 중국은 아직 멀었다는 생각을 한다. 중국은 국력이 충분히 신장되면 미국을 제칠 수 있다고 본다. 한데 최근 미국의 경기 회복이 중국의 예상보다 빠른 것이다.

 미국은 현재 이상적인 상태라고 할 수 있는 3%대 성장률을 구가하면서 실업률을 5%대로 떨어뜨렸다. 특히 미국이 양산하는 셰일가스의 지정학적 영향력이 날로 커지고 있다. 석유 수출을 무기로 미국에 큰소리를 쳐왔던 러시아와 이란·베네수엘라 경제를 모두 주저앉히는 위력을 발휘했다. 이들 국가는 모두 중국의 주요 파트너다. 중국이 위기감을 갖게 된 건 당연하다.

 중국은 이에 재빨리 미국과의 대결 자세를 회피하는 전략으로 돌아섰다. 조용히 힘을 기르자는 덩의 도광양회 전략을 다시 계승하려는 것이다. 시진핑 시대의 신도광양회가 덩의 도광양회와 다른 점은 중국의 핵심이익만큼은 중국이 양보하지 않겠다는 의지를 보이고 있는 점이라는 게 김한권 박사의 설명이다.

 그렇다면 이제 남는 건 우리는 어떻게 할 것이냐다. 중국이 자세를 낮춤에 따라 당분간 미·중 대결 구도는 형성되지 않을 전망이다. 미국이냐 중국이냐 하는 선택의 시험에 들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 그렇다면 미국과의 안보 동맹을 공고히 하면서도 경제적으론 미·중 모두와 손잡는 실사구시적 접근이 필요하겠다. 덩의 가르침은 지금의 우리에게도 꽤 유용하다.

유상철 중국전문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