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aturday] 일본식 벽치기 ‘가베동’ 열풍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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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식품업체 닛신이 ‘가베동(壁ドン·벽치기)’을 주제로 방영한 광고에 등장한 만화의 한 장면. [닛신 광고 캡처]

대기업에 근무하는 마흔 살 일본인 여성 A. 냉철한 커리어우먼으로 직장에서 ‘아네고(姉御·누님)’로 불리는 그의 소원은 연하남의 ‘가베동(壁ドン)’을 받는 것이다. ‘가베동’은 ‘벽’을 의미하는 ‘가베’와 ‘단단한 것을 칠 때 나는 소리’인 ‘동’을 합친 신조어다. 키 크고 잘생긴 남자가 자신을 구석으로 몰고 가 벽을 치며 “넌 왜 이렇게 예쁜 거야. 내 여자가 되겠다고 어서 말해”라는 ‘가베동 망상’은 그의 일상의 오아시스가 됐다. A는 아사히신문이 발행하는 주간지 아에라(AERA) 최신호에 익명을 전제로 “나보다 나이도 지위도 아래인 남자의 가베동이 최고”라고 말했다.

 A뿐만 아니다. 가베동은 지난해부터 일본 드라마·영화·광고를 휩쓸며 인기몰이 중이다. ‘벽치기’로 해석되는 가베동 열풍은 와타나베 아유(渡?あゆ)의 순정만화 ‘L-DK’에서 시작해 진화해왔다. 벽이 아닌 마루에 여자를 밀치는 ‘유카동(床ドン)’에다 여자가 남자에게 하는 ‘역(逆) 가베동’까지 등장했다. 지난해 한 의류업체는 구매 손님에게 가베동을 선사하는 이벤트도 열었다. 옷을 들고 준비된 벽 앞에 서면 남자 모델 두 명이 가베동을 하며 여성 손님에겐 “어째서 그렇게까지 귀여운 거야”, 남성에겐 “이 녀석, 넌 뭘 입어도 어울린다니까”라고 한다. 가베동 열풍을 반영하듯 지난달 도쿄신문은 아베 신조(安倍晋三) 총리가 박근혜 대통령에게 가베동을 하는 장면을 만평으로 그려 “부적절하다”는 비판이 일기도 했다.

 논란도 뜨겁다. 가베동은 자칫 박력 아닌 폭력이 될 수 있다는 점에서다. 아에라 역시 “가베동에 이의 있다”는 제목으로 가베동에 거부 반응을 보이는 여성을 집중 조명하며 가베동 열풍에 제동을 걸었다. 유약한 초식남(草食男)에 질려 박력을 찾는다고는 하지만 가베동은 “개인 영역을 침해하는 폭력 행위”라는 것이다. “폭력적 행위에다 오글거리는 대사까지 하는 가베동을 당한다면 100년의 사랑도 확 식어버릴 것”(36세 교직원), “남자에게 강제로 가베동을 당한다니 본능적으로 거부감이 든다”(36세 외국계기업 직원)는 여성 반응이 나오기도 했다.

 그러나 ‘가베동 긍정파’가 다수다. 가베동이 벽으로 밀치는 행위 이상의 문화적 의미를 갖게 됐다는 게 아에라의 해석이다. 결혼은 물론 연애에도 소극적인 일본 초식남녀들의 대안으로 떠오른 것이 가베동이라는 해석이다. 메이지(明治)대 국제일본학부 후지모토 유카리(藤本由香里) 교수는 “예전엔 ‘손을 잡는다’가 연애의 첫걸음이었던 것처럼 이젠 가베동이 그런 상징이 됐다”고 풀이했다.

 연애 카운슬러인 오다카 지에(小高千枝)는 아에라와의 인터뷰에서 “가베동의 폭력성에만 초점을 맞춰 질색하는 것은 인기 없는 여자라는 증거”라며 “가베동은 이미 사회 현상이 된 만큼 그 현상을 이해하고 동조하는 것만으로도 뇌에서 사랑을 담당하는 영역이 활성화되며 (여성 호르몬) 에스트로겐 분비도 늘어난다”고 주장했다.

전수진 기자 sujiney@joongang.co.kr
영상=유튜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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