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융맨에서 조정선수, 그리고 스키까지… 이정민의 무한도전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제12회 전국장애인동계체전 크로스컨트리스키 남자 5㎞ 좌식 경기가 열린 10일 강원 평창 알펜시아리조트 바이애슬론 경기장. 선수 한 명이 눈보라를 뚫고 양손에 든 스키폴을 힘차게 내리찍었다. 다른 선수들은 힘겨워하는 오르막길도 거침없이 통과한 그는 탁월한 기량을 뽐내며 가장 먼저 결승선을 통과했다. 전날 2.5㎞에서도 우승을 차지한 데 이어 2관왕. 잘 나가던 금융맨에서 국가대표 장애인조정선수로, 그리고 이번엔 스키로 동계종목까지 영역을 넓힌 이정민(31·서울)이다.

이정민은 열 살 때 길랭바레증후군이라는 희귀병을 앓았다. 아직까지 원인이 규명되지 않은 이 병은 말초신경에 염증이 생겨 발생하는 급성 마비성 질환이다. 심할 경우 사망에까지 이를 수도 있다. 이정민은 "초등학교 2학년이던 1991년 11월, 집에 들어왔는데 갑자기 힘이 풀리더니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다음날 입원했을 때는 허리까지 움직일 수 없었다"고 떠올렸다. 재활 치료를 한 결과 지금은 무릎 아래가 불편하다. 꽤 호전됐지만 양 발목을 움직일 수 없어 격렬한 운동을 할 수 없다.

아버지의 권유로 고등학교를 미국에서 졸업한 이정민은 미시간주립대에서 광고학을 전공했다. 그리고 한국 자동차회사 관련 회사에서 일을 하다 2010년 귀국했다. 그는 영국계 금융회사에 근무하면서 남들 부럽지 않은 삶을 살았다. 그의 인생이 바뀐 건 2012년 TV에서 방송된 조정 특집 프로그램을 보고나서다. 그 전까지 한 번도 운동을 해본 적이 없던 그는 무작정 미사리로 향했다.

조정의 매력에 빠진 그는 곧 직장까지 그만두고 매달렸다. 국가대표가 된 그는 2013년 충주에서 열린 세계선수권에 출전했고, 지난해에는 인천 아시안게임에 출전해 2위를 차지했다. 출전자가 세 명밖에 되지 않아 시범경기로 치러졌지만 그에겐 아주 소중한 성과였다.

그가 스키를 시작한 건 지난달. 조정과 마찬가지로 앉아서 할 수 있고, 심폐기능과 근지구력이 필요하다는 공통점이 있어서였다. 이정민은 "외국 조정선수 중 한 명이 겨울에 크로스컨트리를 한다는 걸 알게 돼 도전했다"고 말했다. 조정으로 다져진 그는 한 달 만에 나선 동계체전에서 2개의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11일 열리는 바이애슬론에서는 세 번째 금메달까지 노리고 있다.

모든 게 순탄하지는 않았다. 한남대 교수인 그의 부친 이재광(59)씨는 안정된 미래를 버리고 운동을 시작한 아들을 탐탁하지 않게 여겼다. 이정민은 "회사를 그만두면서 아버지와 4개월 동안 말도 하지 않았다"며 웃었다. 그는 "남들이 넉넉한 수입을 얻거나 좋은 직장에 간다는 얘기를 들으면 아쉽긴 하다"면서도 "솔직히 장애 때문에 자격지심 같은 것이 있었다. 그런데 운동을 통해 내 몸이 건강해졌고, 성취감도 느꼈다. 지금은 부모님도 많이 믿어주고 응원해주신다."

이정민은 두 가지 꿈을 꾸고 있다. 하나는 패럴림픽 출전이고, 다른 하나는 장애인스포츠 외교전문가가 되는 것이다. 이정민은 "올해 프랑스에서 장애인 조정세계선수권이 열린다. 이 대회에서 내년 리우 패럴림픽 출전권을 따내면 좋겠다. 2018 평창 겨울패럴림픽이 있는 크로스컨트리도 마찬가지"라고 했다. 연세대 국제대학원에서 국제협력을 공부하고 있는 그는 "대학원을 마친 뒤에는 장애인체육계에서 국제관계 업무를 하고 싶다"는 바람을 밝혔다.

평창=김효경 기자 kaypubb@joongang.co.kr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