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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이철호의 시시각각

한국에는 칼이 펜보다 강하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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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철호
이철호 기자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이철호
논설실장

“이걸 알아야 돼. 칼이 펜보다 강한 거야. 세상에 어떻게 펜이 칼보다 강할 수 있어? 칼 쥔 놈들은 칼이 강하다고 말 안 해. 왜냐하면 본래 강하니까.” 신문기자 출신의 소설가 김훈의 잡지 인터뷰 내용이다. 그는 이런 말도 남겼다. “펜을 쥔 사람은 펜이 칼보다 강하다고 생각해 꼭대기에 있는 줄 착각하고 있다. 이는 참 위태롭고 어리석은 생각이다.” 김훈의 경고가 죽비처럼 등짝을 내리친 건 이완구 총리 후보자(이하 경칭 생략)의 발언 때문이다.

 지난달 27일, 서울은 아침 최저 영하 7도로 추웠다. 그날 정치부 기자들은 서울 통의동의 이완구 사무실 건너편 길에서 뻗치기를 했다. 이완구는 추위에 떠는 기자 3명에게 번개 점심을 제의했다. 다른 한 명의 기자는 15분 늦게 식당으로 달려왔다. 처음에 닭볶음탕을 시켰으나 이를 취소하고 김치찌개를 주문했다. 술은 시키지도 않았다. 50분 남짓 식사 자리에서 문제의 발언이 튀어나왔다.

 “(방송사 간부에게) 저 패널부터 막아라고 했더니 지금 메모 즉시 넣었다며 빼더라.” “(언론사) 윗사람들하고 내가 말은 안 꺼내지만 다 관계가 있어요. 어이, 이 국장, 걔 안 돼. 해, 안 해? 야, 김 부장, 걔 안 돼. 지가 죽는 것도 몰라요. 어떻게 죽는지도 몰라.” 무서운 이야기다. 전화 한 통으로 보도를 빼거나(보도 통제), 언론사 간부를 통해 기자 하나쯤은 어떻게 죽는지도 모르게 죽일 수 있다(인사 개입)는 것이다. 역시 이 땅에는 칼이 펜보다 훨씬 강한 게 확실한 모양이다.

 이완구는 “평소 친하게 지내던 기자들과 격의 없이 대화하는 사적인 자리”였다며 “다소 거칠고 정제되지 못한 표현을 사용한 것은 저의 부덕의 소치”라고 해명했다. 이 말을 믿고 싶다. 하지만 당시의 기자들은 입사 4~8년의 신참이었다. 그들 중 한 명은 “여당 담당, 야당 담당 그리고 총리실 출입기자까지 뒤섞여 처음 인사한 경우도 있었다”며 낯익은 기자들과 사적 대화가 아니었다고 증언했다. 무엇보다 심각한 것은 그의 언론관이다. 영국 대처 총리는 말했다. “생각은 말이 되고 말은 행동이 되며, 행동은 습관이 되고, 습관은 인격을 형성하며, 인격은 운명을 좌우한다”고…. 이완구의 발언은 취중 실언도 아니고, 평소 그의 생각이 튀어나온 게 아닐까. 문득 앞으로 그의 운명이 궁금해진다.

 일단 청와대는 인사청문회를 강행할 모양이다. 새누리당은 “총력 지원”을 다짐했다. 하지만 이완구가 박근혜 대통령의 기준에 맞는지 의문이다. 대통령은 “어떻게 하면 국민을 잘살게 하느냐는 생각 외에는 다 번뇌”(50회 무역의 날)라고 했다. 이완구는 날마다 새로운 번뇌를 자꾸 얹고 있다. 연합뉴스는 재산·병역·논문표절 ‘3종 세트’에 ‘언론 외압’까지 돌출했다는 제목을 달았다. 대통령의 “어떤 촉새가 나불거려서”라는 잣대만 봐도 이완구의 가벼운 입은 보통 문제가 아니다. 이완구가 국민 공감을 끌어낼 인적 쇄신에 어울리는 인물인지도 의문이다. 이번 사태로 청와대 행정관이 “종편 출연을 못하게 하겠다”며 이준석을 협박한 것까지 사실처럼 여겨지는 분위기다. 과연 이런 게 비정상의 정상화일까.

 『최고의 총리, 최악의 총리』라는 책까지 선물했던 야당은 이제 “거취를 고민하라”며 이완구의 자진사퇴를 주문했다. 문재인 대표는 “단순한 의혹 차원을 넘어선다. 당론을 모으겠다”며 선을 그었다. 청와대가 이완구 카드로 정면 돌파를 시도하는 게 무모한 도박처럼 비친다. 자칫 인사청문회에서 새누리당의 비박(非朴)이 야당에 가세하면 그것으로 끝이다.

 안대희·문창극에 이어 이완구까지 휘청대면서 청와대의 인사청문회 의지는 간절해 보인다. 하지만 털어서 먼지가 나와도 이완구는 너무 많이 나왔다. 국민의 인내를 시험하는 수준이다. 인터넷에는 “정홍원 총리의 유임을 축하한다” “이쯤 되면 다음 총리 후보자가 궁금해지고 기다려진다”는 비아냥으로 도배됐다. 이완구의 발언 파문은 악성 중의 악성이다. 김훈의 “펜보다 칼이 강하다”는 예지력에 탄복할 뿐이다. 자칫 민심의 쓰나미가 청와대를 덮칠지 모를 불길한 징조다.

이철호 논설실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