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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turday] 카드 긁으면 팁 선택화면도 떠 … 액수 늘어 20%는 짠돌이 취급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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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1면

미국 뉴욕시의 변호사 김수정씨가 서울을 방문할 때마다 “한국이라 좋다”고 느끼는 순간은 커피숍 계산대에 설 때다. 테이크아웃 커피 한 잔에 팁을 얼마 줘야 하나 고민하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다.

 그가 다니는 로펌이 있는 맨해튼 단골 커피숍에선 테이크아웃 커피를 주문해도 계산대에 “팁은 얼마 주시겠어요?”라는 문구와 함께 ①1$ ②2$ ③3$라는 선택지가 뜬다. 그 옆의 작은 빈칸에 ‘0’이라고 당당히 써 넣을 수도 있지만 점원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바라보고 있다. 뒤에서 기다리는 손님도 빤히 모니터를 바라보며 “나는 얼마를 선택해야 하나” 고민한다. ‘0’을 써 넣는 수고로움은 강심장이 아니고야 감당하기 힘든 상황이다.

 그나마 가장 낮은 ①을 누르지만 4달러(약 4300원)인 라테 한 잔을 테이크아웃 하면서 1달러를 팁으로 낸다니 아깝다는 생각이 든다. 팁 문화에 적응하는 데 시간이 꽤 걸린 건 뉴욕시 페이스대 민성재(정치사회학) 교수도 마찬가지다. 그는 “10년 전 왔을 때보다 팁 부담이 커진 느낌”이라며 “생활비가 워낙 높은 뉴욕에서 팁 비율까지 높아지는 추세라 괴롭다”고 전했다.

신용카드로 팁을 지불하는 ‘딥자’를 놓은 뉴욕의 한 식당. [사진 NYT]

 팁의 사전적 정의는 ‘시중을 들어준 사람에게 고맙다는 뜻으로 일정한 대금 이외에 더 주는 돈’이다. 미국 초대 대통령 조지 워싱턴(1732~1799)도 자신에게 식사를 서비스한 이들에게 팁을 줬다는 기록이 있을 정도로 미국에선 유구한 문화다. 2009년 펜실베이니아주의 한 식당에선 “웨이터 서비스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는 이유로 팁 지불을 거부한 손님을 절도 혐의로 고소했다. 서비스를 받아 놓고도 그에 해당하는 비용을 치르지 않은 것은 절도와 같다는 논리였다. 이 소송은 식당 측이 소송을 취하해 결론이 나진 않았다.

 이렇듯 미국·유럽 등에서 팁은 강제성은 없으나 암묵적으로 합의된 사회적 비용인 셈이다. 문제는 태블릿PC 등을 이용한 스마트 계산 시스템이 도입되면서 팁에 강제성이 더해지고 그 비율도 높아지고 있다는 데 있다. 뉴욕타임스(NYT)가 지난 2일 ‘4달러짜리 테이크아웃 커피에 팁이 3달러’라고 보도하는 등 미국에선 ‘팁 어디까지 줘야 하나’ 논쟁이 한창이다. 온라인매체 더와이어는 이를 두고 ‘신계급투쟁’이라고 불렀다. 최저임금 수준의 보수를 받고 일하는 서비스업 종사자들과 그 서비스를 받는 이들 간의 커지는 갈등을 빗댔다.

 인터넷에서 해외 여행 에티켓에 관한 글을 보면 ‘팁 주는 법’에 “돈이 잘 보이지 않게 계산서 밑에 숨기거나 지폐를 말아 건네는 게 예의”라고 나오지만 이는 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 얘기다. 태블릿PC 계산대 도입과 함께 신용카드 계산이 대세가 되면서 팁 문화도 진화했다. ‘스마트 팁’ 시스템을 도입한 곳의 계산대에선 ‘팁은 20%, 25%, 30% 중 얼마 내실 건가요?’라고 묻는 글자가 결제 화면을 가득 채운다.

 결제금액이 적은 커피숍의 경우엔 아예 1~3달러 중에서 선택하게 하는 경우가 많다. NYT가 소개한 ‘심술쟁이 카페(Cafe Grumpy)’가 그런 예다. 대략 한 잔에 4달러 하는 커피엔 15~25% 비율보다 1~3달러의 선택지가 더 높은 팁으로 이어진다. 대신 10달러가 넘어가는 경우엔 대신 15·20·25% 비율을 고르게 설정했다. ‘짠돌이’로 낙인찍히기 싫은 손님들의 체면을 악용한 꼼수다.

 신용카드를 터치하면 바로 팁이 계산되는 새로운 기계도 등장했다. 잔돈을 팁으로 넣던 ‘팁 항아리(tip jar)’를 응용한 신용카드 팁 시스템이다. 계산대 옆에 놓인 이 기계에 신용카드를 터치하면 일정 금액이 팁으로 결제된다. 대개 1달러 정도를 요구하는 터라 손님도 부담이 없는 편이다. ‘딥자(DipJar)’라는 이름의 이 상품은 지난해 가을 20여 곳의 식당·커피숍에 시범 설치된 뒤 500개 이상의 매장으로 확대할 예정이다. 멕시코 요리 체인점 도스 토로스의 레오 크레머는 NYT에 “딥자는 신이 보내 주신 선물이자 팁 문화의 혁명”이라고 극찬했다.

 스마트 팁 시스템만으로도 손님 부담은 커졌는데 팁 비율까지 은근슬쩍 높아졌다. 이 현상을 두고 ‘팁 크립(tip creep)’이라는 말까지 등장했다. 슬금슬금 기어가는(creep) 것처럼 팁이 야금야금 올랐다는 의미다. 1940년대까지만 해도 10% 선이었던 적정 팁 비율은 상승 일변도였다. NYT는 “현재의 팁 적정 비율은 통상 15%”라며 “20% 정도 주면 후한 팁”이라고 했지만 이마저 깨지고 있다. 뉴욕 택시에서 신용카드 결제 화면에 뜨는 최저 팁 비율은 20%다. 시사주간지 타임은 이미 2011년 “20% 팁을 준다면 당신은 이제 짠돌이”라며 “25%는 돼야 후한 팁으로 통한다”고 보도한 바 있다. 팁 문화 변천사를 연구해 온 코넬대 호텔경영대 마이클 린 교수는 NYT에 “앞으로도 팁 비율은 올라갈 텐데 대체 어디까지 오를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없던 팁까지 생기고 있다. 홀에서 서빙하는 직원들에게만 팁을 주는 게 아니라 주방 직원들에게도 팁을 요구하는 식당들이 생겨나고 있다. 로스앤젤레스의 이탈리안 식당 알리멘토라는 곳이 그렇다. 이곳은 지난해 12월부터 계산서의 팁 항목을 ‘홀 직원 팁’과 ‘주방 직원 팁’으로 양분했다. 주방에서 접시를 닦거나 감자 껍질을 깎는 이들 역시 배려해 달라는 조치다. 홀 서빙이 최소화되는 뷔페식당까지 팁을 요구하는 추세라고 NYT는 전했다. 실제로 마이애미의 한 블로거는 미국의 유명 맛집 정보 사이트인 ‘차우하운드’에 “뷔페식당에서 저녁을 먹고 나온 뒤 혹시나 해서 계산서를 보니 24%의 팁이 자동으로 추가돼 계산돼 있었다”고 분통을 터뜨리기도 했다.

 이런 ‘팁 크립’ 현상은 미국의 최저임금 논란과도 연결돼 있다. 미국 연방정부에서 설정한 시간당 최저임금 7.5달러로는 대부분 대도시에서 생활비 감당이 어렵기 때문이다. 지난해 미국 여성능력개발센터가 추산한 뉴욕시 4인 가구 한 달 생활비는 6139달러에 달했다. 서비스업계에 종사하는 많은 이가 팁을 주요 수입원으로 삼고 있기에 팁에 대한 불만을 제기하는 게 어려운 구조였다. 그러나 최근 서비스업계의 임금 문제를 소비자들에게 떠넘기는 데 대한 반발도 만만찮다. 이런 반발에 발끈해 “아예 팁을 받지 않겠다”고 선언하는 곳도 극소수이지만 생겼다. 워싱턴에 맥줏집을 개업할 예정인 한 남성은 NYT에 익명으로 “난 (최저임금의 두 배인) 시간당 15달러를 지급하는 대신 종업원들이 팁을 받지 못하게 하겠다”고 말했다.

전수진 기자 sujiney@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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