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으랏차차 '88세 청년'] 3. 1년 유급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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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3부 요인이 된 클래스 메이트. 왼쪽부터 국회의장 직무 대리인 필자, 이영섭 대법원장, 최규하 대통령. 이 사진은 최규하씨가 국무총리로 재직할 때인 '10·26' 직전 한 행사장에서 찍은 것이다.

어린 시절 나는 체격은 작았지만 다부졌다. 개성에서 경성으로 통학하는 학생들 사이에서 대장 노릇도 했다. 기차 칸에서 담배를 피우는 것은 다반사였고 주먹다짐도 곧잘 했다. 당시 통학 기차 칸에서는 일본인 학생과 한국인 학생 간에 마찰과 갈등이 많았다. 나는 일본인 여학생에게 괜히 표를 내놓으라고 윽박지르기도 하고, 남학생들에게는 공연히 시비를 걸어 혼내주기도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일본인 여학생의 머리카락을 잘라 버리는 일이 생겼다. 이 일로 학교가 발칵 뒤집혔다. 학교 측은 내 품행(品行) 성적을 가장 아래 등급인 '정(丁)'을 주었다. 당시 품행 성적의 최상은 갑(甲), 다음으로 을(乙), 병(丙), 정(丁) 순이었다. 이 때문에 나는 낙제, 1년을 유급하게 됐다. 교칙에 따르면 학과 성적이 나쁠 경우에만 유급시키도록 돼 있었다. 하지만 학교 측은 나를 벌주기 위해 학과 성적이 좋더라도 품행이 나쁘면 낙제시킬 수 있도록 교칙까지 바꿨다. 그래도 나는 선처를 받았다고 생각했다. 그때 퇴학 당했다면 지금의 민관식은 없었을지 모르기 때문이다.

나의 유급은 가족들에게 청천벽력과도 같았다. 어른들은 낙제 당한 나를 계속 학교에 보낼지를 놓고 고심했다. 가족들은 학교 측의 요청을 받아들여 나의 기차 통학을 중단시켰다. 그 바람에 나는 경성의 가회동에서 가정교사 생활을 하면서 학교를 다녔다. 경성 생활을 하면서 친구를 많이 사귀었다. 이때 사귄 친구들 중에 종로구 단성사 뒤 봉익동에 있는 재종(再從) 형의 집에서 학교를 다니던 키 큰 친구가 있었다. 나중에 국무총리와 제10대 대통령을 역임한 최규하다.

나는 입학 연도로 따지면 경성제일고보 32회다. 입학동기 중에는 대통령 권한대행 서리를 지낸 박충훈과 부완혁 등이 있다. 하지만 유급하는 바람에 졸업은 33회로 했다. 그래서 나의 졸업 앨범은 두 개다. 32회와 33회 졸업 앨범을 다 갖고 있다. 32회 앨범의 뒷부분을 보면 '제32회 졸업회원 외의 동문회원'난에 나를 비롯해 10여 명의 학생이 나온다. 유급생들이다. 여담이지만 낙제로 인해 경성제일고보 33회 졸업생이 된 것은 오랜 시간이 흐른 뒤 흔치 않은 결과를 만들어냈다. 1980년, 졸업 동기 세 명이 3부 요인이 된 것이다. 최규하 대통령, 이영섭 대법원장, 그리고 국회의장 직무대행인 나. 셋은 졸업 동기일 뿐 아니라 클래스 메이트였다. 이는 아마 세계적으로도 유례가 없는 일이 아닌가 싶다.

최규하와의 인연은 각별했다. 최규하는 경성제일고보 졸업 후 동경고등사범학교와 만주 대동학원을 다녔다. 서울사범대학에서 교편을 잡다가 광복 후에는 공직 생활을 했다. 우리가 다시 얼굴을 맞댄 것은 내가 국회의원이 돼 정치에 발을 들여 놓으면서부터다. 학창 시절부터 단정하고 성실했던 최규하는 활달하고 운동을 좋아하던 나와 사뭇 달랐다. 나는 운동과는 담을 쌓고 사는 최규하에게 여러 번 함께 운동하기를 권했다. 최규하가 말레이시아 대사를 지낼 무렵 나는 대한체육회장으로서 방콕아시안게임에 참가했다. 귀국 길에 말레이시아에 들러 최규하를 만났다. 당시 대한민국 대사관은 골프장과 담을 맞대고 있었다. 나는 최규하에게 말했다.

"이 사람아, 운동 좀 하게. 건강해야 큰일을 하지. 옆에 골프장도 있으니 운동하기에 얼마나 좋아. 하느님이 주신 기회일세."

최규하는 씨익 웃을 뿐 대꾸하지 않았다. 나중에 그가 총리가 됐을 때도 함께 운동하기를 권했지만 "그 얘긴 그만 하자"는 대답만 돌아왔다. 이렇게 운동하기를 꺼리면서도 최규하는 나를 만날 때마다 "그 나이에도 건강하고 운동을 즐기는 게 부럽다"고 한다.

민관식 대한체육회 명예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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