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89>제79화 육사졸업생들|진중일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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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1면

월남전 이야기를 연재하는 동안 청룡부대 1진으로 파월됐던 오륜진중령(해병간부7기·소장예편)은 2년동안 월남에서 적은 진중일기를 보내주었다. 정말 좋은 자료였다.
그의 일기 몇 토막을 그대로 전재하여 청룡부대가 첫 전투를 치렀던 당시의 상황을 대신하고자 한다.
10월12일 (65년) . 어젯밤부터 폭우가 쏟아지고 있다. 부대원들은 온몸에 비누칠을 하고 밖에 나가서 오랜만에 진짜 샤워를 하는 모양이다.
상오10시께 참모회의중 6중대에서 오발사고가 났다는 보고를 받았다. 12시께 나트랑으로 후송되던 사병은 헬리콥터 안에서 절명했다는 것이다. 자살한 것같다. 비전투손실 제1호다. 포항을 떠날때 『여러분 자제분들의 손가락하나 다치지 않도록 해서 데리고 오겠다』 고 면회온 가족들에게 말했었는데 이제는 다 틀렸다. 6중대장도「어제 발송한 가정통신에 잘 있다고 했는데』하면서 한숨을 길게 내쉰다.
10월28일. 한달만에 고국에서 온 묵은 신문뭉치를 받았다. 낙엽이 떨어진 인도 위를 걷는 털스웨터를 입은 남녀의 사진을 보고서야 우리나라의 계절이 짐작되었다. 『수재민 천막에 이미 엄동』 이란 표제의 사진, 김장값과 구공탄 걱정하는 만화를 보고 벌써 그럴 때가 됐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10월29일. 어젯밤에도 6중대 전방에서 플래시가 비쳤고 총소리가 났다. 7중대에도 돌이 4개가 날아왔다. 살살탐색하는 품이 수일내 기습이 있을 것이 분명하다. 주월미군 야전군사령관「라슨」장군이 왔다. 어제처럼 브리핑을 했더니 만족해하면서 책임전술지역이고 그밖이고 모두 때려부수라고 권고했다. 채명신사령관이 첫 전투를 자기 맹호부대보다 해병대가 먼저 하는것을 반대했었는데 맹호부대가 마침 어젯밤에 3명의 베트콩중 2명을 사살하는 전과를 올려 대단히 기뻐하고 있다고 한다. 우리도 오늘밤에는 매복작전을 펴 꼭 잡아야겠다.
11월4일. 미신같은 것은 아예 생각하지 않기로 했지만 11월4일이란 날짜가 혹시 나쁘지않을까, 우리의 작전계획이 탄로나지 않았을까, 전방지휘소가 적의 81mm박격포 결사대의 집중사격권에 들어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등으로 잠이 오질 않았다.
새벽4시반에 스몰 라이트만 켜고 어제 정찰해둔 삼거리 옆 모래밭으로 이동했다.
상오 6시50분부터 비행기 폭격이 계획되어 있었으나 7시10분이 되어서야 미공군 제1번 제트기가 내리꽂기 시작했다.
3백18m의 카두산은 삽시간에 연기에 싸였다. 제2번기가 너무 미리부터 폭탄세례를 하는 것 같더니 우측을 차단하고 있는 월남군중대 후방에서 연기가 솟아올라 수상했다.
잠시후 『우리병사 5명부상』 이라는 보고가 들어왔다. 1명은 앰뷸런스로 실어오던중 절명했다고 한다. 1명은 두팔이 몽땅 없어지고.
미군기가 잘못하여 우리 81mm 박격포 진지에 폭탄을 내리부은 것이다. 홧김에 헬기를 타고 부대진출선과 돌산 주변을 네번이나 돌았다. 바위틈, 나뭇가지 사이에서 부대원들이 손을흔들며 좋아했다. 318고지는 계획시간보다 30분이 늦은 낮12시30분에 점령했다. 죽창 14개, 자전거1대등 40여점을 노획했으나 베트콩은 한놈도 생포하지 못해 허전하다.
죽은 우리대원, 팔 잘린 젊은이를 생각하면 더욱 그러하다.
11월7일 참모장님과 나트랑에 갔다. 병원엘가니 4일 카두산 작전에서 양팔이 잘린 주일병이 『대대장님』 하고 우는 것이었다. 나는 할 말도 없었고 악수할 손도 그에겐 없었다. 작전 전일『잘해달라』며 내가 잡았던 그의 손은 어디로 갔는지. 나도 울지 않을 수 없었다. 오늘저녁 본국으로 후송한다고 한다.
11월28일. 판랑에서 순찰중 전사했던 7중대3소대 분대장 김하사 앞으로 그의 누님에게서 편지가 왔다. 망설이다 뜯어보았다. 『지금 이 누나는 나이 어린 너희들이 베트콩과 총을 맞대고 있다는 것을 생각하면 눈물이 난다. 건강한 모습으로 돌아오게 해달라고 하느님께 기도하곤 하지. (중략)시간 있으면 편지다오.』가슴이 찢어질것만 같아 혼자 흐느껴 울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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