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88》제79화 육사졸업생들(241) 장창국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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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청용부대는 65년10월2일 l8륜의 특별열차로 포항에서 부산으로 이동, 제3부두에 정박해 있던 미해군수송선 가이거호와 엘틴저호에 탑승했다.
10월3일상오9시 청용이 떠나는 부두에는 김종필의원·김성은국방장관·공정식해병대사령관·강기천해병제l사단장등이 나와 전송을 해주었다.
엘틴저호와 가이거호가 움직이자 함상에서는 「나가자 해병대」 「동백아가씨」 「해병대 곤죠가」가 계속 이어지고 있었고 장병가족들은 배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잘싸우고 오겠심더』『자야 퍼떡 갔다 오꾸마』 『베트콩. 너는 죽었다』 고 쓴 플래카드를 흔들어 주었다.
해병2대대와 3대대, 육군군수지원단요원등 2천8백11명이 탄 엘틴저호는 원래 l천5백명이 정원이었다.
취사병도 단 4명뿐이어서 3천명에가까운 승선인원을 감당치 못했다. 아침식사가 새벽5시부터 시작되었으나 상오11시가 되도록 끝나지 않았다고 한다. 하루종일 식당문을 열어 놓아도 하루3끼를 다 찾아먹는 병사는 몇명되지 않았다. 수저가 준비되지 않아 칼로 음식을 찍어먹는 사병도 있었고 고기 한점에 아이스크림 한숟갈로 식사를 때우는 사병도 있었다.
이봉출여단장은 홧김에 장교식당이용을 사절하고 2대대장 오윤진총령·3대대장 전정남중령을 데리고 사병식당에 가서 병식을 같이 했다고 한다.
10월8일상오6시30분 청용은 세계에서 1,2위를 다룬다는 랑항 캄란에 임항했다. 배는 항구에 완전 입항하지 않고 외항에 정박했다. 월남수상을 비롯한 고위장성들이 출영나오도록 계획돼있었기 때문에 상륙시간을 9일상오로 늦춘것이었다.
청용은 상륙즉시 1대대는 캄란반도에 있는 미군비행장건설현장의 경비임무에 배치되었고 2대대와 3대대는 1번국도옆 베트콩지역예 배치되었다.
한편 맹호부대주력 7천여명은 10윌13일 4척의 수송선에 분승해 인천항을 떠나 22일상오 퀴논항 블루비치에 무사히 상륙했다.
맹호의 출발은 수송 작전상 비밀로돼 있었기 때문에 국내신문에는 10윌l9일에야 보도된 것으로 기억된다. 맹호가 상륙하던 날은 마침 퀴논지역이 우기여서 비가 억수로 퍼부었다고 한다.
맹호는 퀴논공설운동장에서 열린 환영식에 참석하고 곧바로, 퀴논 서남방 20km지점인 칸안카반계곡으로 이동, 월남의 중부전선을 동서로 잇는 19번도로 경비를 위해 포진했다.
맹호가 도착하기전 이지역을 맡고 있던 미제1기감사단과 제101공정여단이 퀴논일대에서 베트콩 섬멸작전을 벌여 40여명의 전사자까지 내면서 자리를 잡아두었으나 맹호주둔지로부터 60km북방 평야에는 베트콩 1만3천명이 주둔하고 있었다.
채명신사령관이하 맹호장병들은 『2주안에 작전개시, 2개월뒤 전술책임구역(TAOR)장악』이라는 목표아래 우선 폭우와 진흙탕과 싸워야했다.
퀴논일대는 12월까지 우기가 계속되어 온통 물바다였고 이따금씩 날이 개면 불볕이 내리쬐어 감탕밭이 금방 돌덩어리 처럼 변해버려 진지를 파는 삽이 퉁길 정도였다고 한다. 주둔지주변에는 가시덩굴과 독거미가 득실거렸다고 한다. 정글에 겨우 천막치기 작업이 끝나자마자 베트콩은 맹호를 시험해왔다.
맹호의 첫 전투로 기록된 「풍손전투」는 맹호가 퀴논에 상륙한지 1주일만에 벌어졌다. 장세동대위 (육사16기·현역소장)가 지휘하는 1연대1대대3증대는 28일밤 퀴논북방 km지점의 풍손부락에 숙영하고 있었다.
이날밤9시30분쯤 3중대는 부대정면에 출현한 수미상의 적용 사격으로 격퇴했으나 29일 상오1시20분쯤 배트콩 3명이 다시 3중대3분대에 정면으로 접근해왔다. 베트콩은 물이 가득찬 논위를 소리도 없이 기어왔다고 한다. 안윤옥2병(경기도양평출신)등 분대원 3명은 적이 3m전방에 까지 오드록 숨을 죽이고 있다가 일제사격을 가해 2명을 사살하는 첫 전과를 올려 맹호의 사기를 높였던 것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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