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나를 있게해준 돈지갑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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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0면

6·25가 끝나고 제대했을때 내나이 24세였다.
미국유학을 하려하니 무일전 신세였다.
겨우 한미재단의 도움으로 미국행화물선에 짐짝같이 올라탈수가 있었다.
내주머니엔 친구와 단골다방주인이 여비로 쓰라고준 1백5달러가 전재산이었다.
미국에 친척이나 친지가 있는것도 아니요, 그야말로 무작정 유학인 셈이었다.
고생고생 끝에 목적지인 테네시주의 터스큘럽대학에 도착했다.
기숙사비·수업료는 면제받는 장학생이었지만 친구와 교과서 값은 스스로 조달해야만 했다.
그림도 그려 팔고 리포트대필(내것도 제대로 못썼던 주제에 말이다), 실험기구 청소와 자동차세차등을 하면서 1년간을 지냈다.
드디어 졸업의 날이왔다.
많은 학부모·친족들이 자기자녀의 졸업식을 축하해주기 위해 전죽서 몰려왔다.
아름다운 꽃과 옷의 색채와 환성속에 파묻힌 축복받은 그네들과는 대조적으로 나의 졸업을 반길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그러나 나는 식후에 터스큘럼대학총장이었던「레이먼드·랭킨」박사를 찾아갔다.
공짜로 공부시켜주고 먹여주고 재워주신 후대에 감사하고 고별하는 인사를 드리기 위해서였다.
인사를 마치고 떠나려할때 그분은 『잠깐!』하신다.
『조군은 고생하면서도 졸업까지 끌고 왔으니 나도 자랑스럽게 생각하는데, 지금 수중엔 얼마나 있나?』
『25달러입니다.』
『그래?』하더니 자기 상의에서 돈지갑을 꺼내신다
『얼마 들어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그대로 갖고 가게 돈이 다 떨어져 도저히 못견디겠으면 전보나 전화를 해주게 그럼 행운을 비네!』
나는 할말이 없었다.
밖으로 나와서도 열어보질 못했다.
그 돈지갑을 꼭 내가슴에 품고 다니다가 3일뒤에 열어보았다.
그속엔 75달러가 들어있었고 그것으로 연명할 수 있었던 덕분으로 오늘의 내가 있을수 있었던 것이다.
내가학자로서 처음 출판한 책엔 그분의 이름을 권두에 헌사와 함께 새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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