잃어버린 36년<21>불굴자료와 새증언으로 밝히는 일제통치의 뒷무대-3·1운동(4)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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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3·1운동의 전위는 학생들이었다. 학생운동의 중심은 YMCA의 박희도, 세브란스병원의 이갑성등과 이들과 연결되어있던 연회전문 김원벽, 보성전문 강기덕, 보성출신인 주익, 경성의전 한위건, 세브란스의전 이용설등이었다. 선교사들을 통해 국제정세의 흐름을 알고있던 이들 학생들은 1윌6일 모임을 가졌다. 이 모임에서 강기덕은 『파리강화회의에 때맞춰 우리학생들도 해외지사들과 연락해 일을 전개해야 한다』고 했고 주익은 『이번 강화회의에서 유럽의 약소국 몇 나라가 독립했다고하며 우리 대표도 파리에 가있다. 이기회에 궐기해 독립운동을 벌이면 조선도 독립할수 있을것』이라고 했다. 독립운동을 전개한다는데 뜻이 모아졌고 이들은 곧바로 활동을 시작했다.

<거사논의 쉽게일치>
2월4일 학생대표회의는 거사를 중등부에까지 확대하가로했다. 그무렵 학원의 움직임은 총독부의 보고가 잘 말해주고 있다. 『국장을 전후한 불온한 계획에대해 모든 학생들은 신앙적 확신을 가지고 큰기대를 끌고있는듯하다. 각급학교에서는 외부로부터의 선동에 대비, 엄중한 감시를 펴고 있으나 팸플리트 또는 비라를 은밀히 학생에게 보내오고 있으며 교내에까지 유인물을 가지고 들어와 학생들의 집합장소 또는 변소등에 불여놓는 경우도 자주 눈에 뛴다. 일본에 있는조선인 유학생중 귀선하는 자들이 최근 크게늘어 이들이 각학교 학생들과 연결, 불온계획을 선동하고있다』 (조선총독부 학무국보고) .
○…몇갈래로 나누어져 추진되던 거사논의도 쉽게 하나로 통합됐다. 2월21일 최남선이 이승훈을 찾았다. 총독부의 눈을 피하느라 부득이 연락을 일시 끊었었다고 사과하고 이숭훈을 최린의 집으로 안내했다. 이곳에서 세사람은 그동안의 준비상황을 점검하고 천도교와 기독교가 주체가되어 거족적 독립운동을 추진키로 합의했다.
이승훈은 최린과 면담한후 곧바로 이갑성의 집에서 박희도·오기선·신흥식·안세환·오화영·현순등과 만나 천도교와의 합작을 확인하고 이승훈·함태영을 기독교측 연락대표로 정했다. 이승훈은 박희도에게 학생들도 합류토록 권유했다. 학생대표단은 회의를 열고 합류에 동의했다. 학생들이 따로 준비하던 독립선언서등은 철회하고 거사날짜도 모두 맡기되 조직은 별도로 유지한다는 선이었다. 이렇게해서 천도교·기독교, 그리고 학생이 하나로 합류했다.
○…불교계는 한용운이 앞장서 참여의 문을 열었다. 한용운은 총독부가 조선사찰령을 발표, 이른바 통합이란 이름아래 한국불교를 일본불교에 예속시켜 친일세력으로 이용하려 했을때 반대에 앞장섰던 학승이다. 당시 불교계의 상당수는 친일로 기울어 있었다. 한용운은 최린을 찾아 거사계획을 듣고 합천해인사로 가 백용성과 의논, 불교참여를 결정했다.
그는 유학자등 저명인사 교섭도 스스로 맡았다. 그는 당대의 거유곽종석을 거창으로 찾아가 민족대표로 나설것을 권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그는 월남 이상재도 찾아갔다. 이상재는 병합후 관직을 내놓고 YMCA에 참여. 청년지도자로 위치를 굳히고 있었다. 이상재는 한용운에게 『동지들의뜻에는 찬성하나 앞에 나서지 않고 뒤에서 후원을 아끼지않겠다』고 했다.
한용운은 뒷날 『그때 월남이 나와주었더라면 민족지도자 백인이상의 확보는 문제없었을텐데』라는 말로이상재마저 소극적인태도였던데 대한 그의 울분을 털어놓았었다.
3·1독립선언에 참가하지 않은 이상재에 대한 한용운의 원망은 뿌리깊었다. 1927년 이상재가 죽은뒤, 그의 공적을 기려 사회장을 치르게 됐을때 장의위원 명단에 한용운의 이름이 들어있었다. 이를 안 한용운은 장의위원회에 찾아가 위원명부에 적혀있는 자신의 이름 석자를 펜으로 박박 지워버리고 돌아왔다는 일화가 있다.

<거문고 속에 감춰>
○…독립선언서는 준비를 주관해온 최린이 최남선에게 기초를 맡겼다. 『대표들사이에서 독립청원론도 있었지만 민족의 자주성에 입각해 선언으로 한다. 다만 일본을 심하게 자극치 말것』이라는것이 선언문 기초의 지침이었다. 최남선은 기초를 맡으면서 민족대표에서 자기이름을 빼달라는 조건을 내걸었다. 평생을 학자로 지낼 결심이어서 표면에 나서고 싶지 않다는것이 그이유였다.
독립운동의 최초 모의단계부터 참여해온 최남선의 갑작스런 후퇴가 최린에겐 이해가 안되는 노릇이었지만 고집이 완강해 이를 수락했다. 최남선은 친구 임규의 집에 은거하며 선언서를 집필했다. 부인이 일본인인데다 일어교사인 임규의 집은 집필장소로는 안성마춤이었다.
최남선은 초고를 한복저고리 동정에 꿰어넣고 최린의 집에 왔다. 최린은 초고를 읽어보고 흡족해하면서 벽에 걸린 거문고속에 감췄다.
이 선언서와 관련한 일화 한토막.
한용운이 최린으로부터 최남선이 내놓은 집필조건을 듣고 『독립운동에 책임을 질수 없다는 최남선이 선언서를 기초한다는건 안된다. 내가 맡아 기초하겠다』고 했는데 최린이 시간이 촉박하니 양해하라고 간신히 설득했다는것.
○…거사는 3월1일 파고다공원으로 결정했다. 3월3일의 인산날하루전이 좋지만 마침 2일이 일요일이어서 1일로 정한것.
민족대표자수는 처음엔 기독교와 천도교 각 10명내외로 하려했으나 교파가 많은 기독교의 사정으로 기독교 16명, 천도교 15명, 불교 2명으로 했다.
천도교측에선 권동진이 인선을 말았다. 손병희가 인정한 천도교간부중 이종일·권병덕·양한묵·김완규·홍기조·홍병기·나용환·박준승·나인협·임예환·이종훈등에게 내용을알리고 서명토록 함으로써 손병희·권동진·오세창·최린을 합쳐 모두15명을 결정지었다.
기독교측에선 2월26일 이승훈·박희도·오화영·최성모 이필주등이모여 서명을 결정하고, 여기에 양전백·이명룡·유영대·김병조·길선주·신흥식·정춘수·이갑성·김창준·박동완·신석구가 추가됐다.
불교측에선 한용운·백용성이 서명, 서명자는 모두 33명이 됐다.
송진우는 중도에 스스로 빠지고 현상윤은 최린의 만류로, 함태영은 기독교대표들의 투옥후 가족보호를 위해 서명에서 빠졌다.
서명대표들이 2월27일 최린의 집에 모였다. 기독교에서 이승훈·이필주·함태영, 불교 한용운, 그리고 최린이 천도교를 대표했다. 서명자순서에서 기독교측은 가나다순이나 나이순을 제안했다. 이에대해 상하관계가 뚜렷한 천도교가 난색을 표시했다. 최린은 손명희가 서명자의 맨앞에 있어야 한다는데 있어 강경했다.
기독교에서 반대가 있었으나 이승훈이『순서가 무슨 문제요. 이건죽는 순서아니요』라며 천도교측 제안을받아들였다. 이래서 1번에 손병희, 2번엔 장로교의 길선주, 3번 감리교의 이필주, 4번에 불교의 백용성, 그다음은 가나다순으로했다.

<5천원 줘 입막아>
○…독립선언서 인쇄는 천도교가 운영하던 보성학교안 보성사인쇄소가 맡았다. 문선은 최남선의 신문관에서하고 27일밤부터 인쇄에 들어갔다. 보성사사장 이종일은 하오6시부터 창문마다 검은 장막을 치고 공장감독 김홍규와 인쇄공 하나만을 데리고작업을 시작했다. 인쇄가 한참 진행중일때 문을 세차게 두드리는 방문객이 있었다. 종로경찰서 한국인 형사 신철이었다. 창을 가리고 작업하는것을 수상하게 여겨 급습한 신철이었다.
이종일은 신형사의 소매를 잡고매달렸다. 『하루만 눈감아주면 백일하에 드러날 일이오. 이것만은 누구도 막지못합니다』 신철도 머뭇거렸다. 이종일은 신철에게 잠깐만 기다려달라고 하곤 손병희의 집으로 죽을 힘을다해 뛰었다. 손병희는 사태를 전해듣고 거금 5천원의 지폐뭉치를 주었다. 이종일로부터 거액의 뇌물을 받은 신철은 도리어『누구에게도 얘기말라』면서 사라졌다. 위험의 고비를 넘기고 인쇄가 끝나자 선언서를 바로 신축중이던 경운동천도교당 창고로 운반했다
운반도중 재동주재소앞을 지날때는 정전이어서 무사통과였고 순찰순사의 검문에는 족보라고 둘러대 통과했다. 인쇄때의 뇌물사건은 3·1운동의 연루자가 체포되고 인쇄과정이 추궁되는 가운데서도 한동안은 덮어져 있었지만 결국 5월초에 들통이 났다. 마침 만주지방에 출장갔다가 돌아오던 신철형사는 서울역에서 대기중이던 헌병들에게 체포되었다. 그는 자신의 운명을 짐작하고 있었던듯 다음날 취조를 받던중 숨겨뒀던 극약을 마시고 자결해 버렸다.

<태화관으로 집결>
○…거사전야인 2월28일 민족대표들은 가회동 손병희 집에 모였다. 10명은 서울도착이 늦어 23명이 참석한 준비회의였다. 손병희는 거사준비가 차질없이 진행된데 감사한다고 노고를 치하했다. 박희도가 학생동향을 보고했다. 파고다공원에 학생과 민중이 모이면 군중심리로 큰 소란의 우려도 있다고했다. 의견이 분분했지만 폭동이 일어나면 거친 탄압의 구실이 될우려가 있다는 것이 다수의견이었다. 이래서 민족대표의 집합장소는 파고다공원이 아닌 명월관지점 태화관으로 변경했다.
같은무렵 정동교회에는 각 중등학교 학생대표, 승동교회엔 전문학교 대표들이 모여 내일의 학생동원조직을점검하고 독립선언서 배포등 마지막 점검을 하고있었다.
○…독립선언서 배포도 분담했다. 일본정부와 의회에 대한 전달은 임규가 맡았다. 임규는 27일 밤차로 서울을 떠나 3월1일하오에 도오꾜에 도착했다. 그는 경찰의 눈을피해 그의 딸이 근무하는 나까무라라는 과자집에서 묵었다. 그는3월1일 거사가 예정대로 일어났는지를 확인하지못해 행동을못했다.
결국 3월3일 도오꾜신문들의 조선사태보도를 보고서야 일본정부와 의회에 보내는 서류를 우편으로 발송했다. 1백여통의 유인물은 각신문사, 동경대교수 「요시노」, 그리고 일본의회의 유력대의사앞으로 따로 발송했다(경성지방법원취조서).
이와별도로 기독교측의 안세환이 도오교로와 총리대신과 기타 유력정치인을 직접 만나 조선독립을 진정하려 했으나 경시총감만을 만나고 3월5일 체포되었다.
파리강화회의에 문서를 보내는 일은 기독교측 현순과 김지환이 맡았다.<특별취재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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