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중앙 시평

'강 교수 건' 소모적 정쟁 끝내라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35면

애초 이 문제는 학계에서 거르는 것이 가장 바람직했다. 이미 여러 지면을 통해 여러 학자가 그의 발언이 얼마나 터무니없고, 최소한의 학문적 진지성과 성실성을 갖추지 못한 것임을 지적했다. 적어도 해당 학계에서 그의 발언은 이미 시민권을 잃은 지 오래다. 그의 구속을 반대하는 사람들조차도 반드시 서두에 "그의 발언에 동의하는 것은 아니지만"이라는 말을 붙이는 것을 보면 그의 말은 정치적 동조자들 사이에서도 시민권을 유지하기가 어렵게 보인다. 따라서 이 문제를 처리하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해당 전공자들이 나서서 지식의 시장에서 그가 파는 상품이 더 이상 매력이 없음을 증명시켜주는 것이었다.

그랬다면 이 문제를 둘러싸고 소모적 논쟁도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고, 강 교수를 국보법 폐지의 상징적 인물로 만들어주지도 않았을 것이다. 이 점에서 강 교수를 고발해 문제를 법적 차원으로 확대시킨 일부 보수 세력의 단견에 아쉬움을 금할 수 없다. 그들의 지나친 민첩함은 학계가 스스로 이 문제를 해결할 시간을 앗아가 버리고 말았다.

문제가 둘째(법적) 차원으로 비화된 뒤에도 그것을 정치적 차원으로까지 더 확대시키지 않을 수 있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강 교수의 발언이 국보법에 저촉되는지의 여부를 법원이 가려줄 때까지 기다리는 인내심이 필요했다. 우리 헌법은 자유민주주의 체제의 근간을 뒤흔들 정도의 행위에 대해서까지 관용을 베풀지는 않는다는 '방어적 민주주의' 개념을 채택하고 있다. 강 교수의 발언이 과연 이 정도에 해당하는지는 검찰과 사법부가 판단할 일이고 정치권은 그 결과를 기다렸어야 했다.

이러한 기다림의 미덕을 깬 것은 천 장관이다. 그는 법에 있다는 이유로 지휘권을 행사하면서 적법성을 주장했다. 그러나 그의 행위가 입법 취지에 맞지 않는다는 점에서 적법할지는 몰라도 정당하지는 않다는 주장이 맞서고 있다. 어쨌든 천 장관의 지휘권 발동으로 이 사건은 단숨에 정치적 차원으로 비화되고 말았다. 그는 지휘권 발동의 동기를 개인의 인권보호를 위해서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이 기회에 그의 평소 소신인 국보법 폐지를 공론화시키기 위해서라는 말도 있고, 남북정상회담의 길을 닦기 위해서라는 말도 들린다.

이제 이 문제에서 강 교수 발언의 진위 여부나 강 교수 자신은 뒷전으로 밀렸고, 대신 정치권이 문제의 중심으로 진입했다. 한나라당은 이 문제를 국가정체성의 위기로 몰고 갔고, 청와대와 열린우리당은 구태의연한 색깔론이라고 맞섰다. 주객이 바뀐 것이다.

문제를 다시 본질로 돌려 해결책을 찾아야 한다. 우선 문제를 정치화시키면서 검찰의 중립성을 후퇴시킨 천 장관은 그에 합당한 책임을 져야 한다. 그리고 정치권을 비롯한 모든 사람은 문제를 인위적으로 키워 소모전에 빠지지 말고 검찰의 수사와 그에 대한 사법부의 판단을 기다려야 한다.

이제 한국의 합리적 보수도 자유민주주의가 반공에만 의존하고 있지 않음을 보여주어야 한다. 강 교수 건은 합리적 보수에는 이러한 유연성과 자생력을 보여줄 수 있는 좋은 기회다. 물론 이 사건이 올해를 '반미자주화의 원년'으로 삼자는 조직적 움직임의 일환으로 여겨질 수도 있다. 그렇더라도 이렇게 호들갑을 떨면서 강 교수를 '영웅'으로 만들어 줄 필요는 없다. 자칫하면 그를 국보법 폐지를 넘어 '반미자주화의 상징'으로 만들 수도 있기 때문이다.

김일영 성균관대 교수정치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