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류 뜨자 이런 역풍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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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과 한국인을 폄하하거나 왜곡하는 내용으로 가득 찬 일본 만화책 '혐한류'.

20일 오후 일본 도쿄(東京) 신주쿠(新宿)의 기노쿠니야(紀ノ國屋) 서점.

도쿄 최대 서점 중의 하나인 이곳 1층 한가운데 코너엔 늘 화제의 서적이 진열된다. 그 절반은 한류 관련 책이다. '권상우의 비밀' '한국드라마 완전 해부' 등 30여 가지쯤 된다.

그런데 얼마 전부터 '이상한' 만화책 한 권이 이 코너에 등장했다. 한류를 미워한다는 뜻의 '혐한류(嫌韓流)'가 책 제목이다. 발행 두 달 만에 30만 부가 넘게 팔렸다. 책을 펼쳐 보니 "한국은 월드컵 때 심판의 오심 덕분에 4강에 진출했다" "식민지 시절 한글을 못 배우게 한 건 한국인 교장들이다" 등 한국에 대한 비하와 사실 왜곡으로 빼곡하다. 책 곳곳엔 우익 교과서를 만드는 '새로운 역사를 만드는 모임'의 니시오 간지(西尾幹二) 명예회장 등 극우 인사들의 한국 비난 글들이 실려 있다.

이 책을 읽고 있던 대학생 마쓰우라 스스무(松浦進.21)는 "솔직히 책 내용이 다 맞다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처음 들어보는 내용들이 많아 신선한 느낌도 준다"고 말했다.

올 상반기에 출판된 '한국 남성을 사랑해선 안 되는 36가지 이유'란 책도 눈에 띄는 곳에 진열돼 있다. '욘사마도 알고 보면 이런 남자였던가'라는 표제가 눈길을 끈다. 내용은 "한국 남자는 아무 곳에나 침과 가래를 뱉고, 말보다 주먹이 먼저, 섹스도 자기 멋대로다"는 식이다.

이 서점의 한 관계자는 "혐한 관련 책은 주요 출판사에서 취급해 주지 않기 때문에 대개 중소 출판사를 통해 발행되고 있다"며 "'혐한류'가 베스트셀러 대열에 오르자 소규모 출판사가 장삿속으로 비슷한 책들을 계속 내놓을 가능성이 있다"고 예상했다.

해외 각국에서 한류 바람은 여전히 거세다. 최근 KOTRA가 70개국 100개 도시에 사는 5200여 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한류 덕분에 한국에 대한 이미지는 크게 향상된 것으로 나타났다. 특히 중국 응답자의 82%, 일본 응답자의 78%가 "한국에 대해 좋은 생각을 갖고 있다"고 응답했다.

한류 열기가 뜨겁다 보니 일본과 중국 일각에서 반(反)한류 기류가 나타나고 있다. 일본에선 한국을 미워하자는 혐한류가, 중국에선 한류에 대항하자는 항(抗)한류가 고개를 들고 있다.

중국의 유명 배우 장궈리(張國立)는 지난달 28일 "한국 드라마 '대장금'을 보고 화가 났다. 중국이 발명한 침술을 마치 한국이 발명한 것처럼 묘사하고 있다"고 비난했다. 그는 또 "중국은 지금까지 많은 외침을 당했지만 문화적으로 노예가 된 적은 없다"며 "중국 방송이 한국 드라마를 방송.찬양한다면 그것은 중국을 문화 노예로 만드는 것"이라고 말했다. 인기 탤런트 탕궈창(唐國强)도 "지금부터 한국 드라마의 나쁜 점을 찾아 정면 공격을 펼치면 두려울 게 없다"며 한류와의 투쟁을 선언했다. 드라마 제작자들도 한류 폄하에 동조하고 있다. 중국영화드라마제작센터의 옌젠강(閻建鋼) 주임은 "한류는 얼마 못 간다. 한국 드라마는 대부분 방송사에서 제작되기 때문에 깊이가 없고 완전하지도 않다"고 비판했다.

일본의 경우 방송이나 신문이 '혐한'을 직접 거론하진 않는다. 다만 검증이 불가능한 인터넷이 문제다. 만화 '혐한류'도 엄밀히 말하면 인터넷상의 각종 '안티 한국'사이트에 돌아다니는 이야기들을 주워 모은 것에 불과하다.

일본 포털 사이트인 '야후 재팬' 검색창에 '반한'이란 단어를 치면 수백 개의 관련 사이트가 뜬다. '흉내 대국 남조선'이란 사이트에 들어가면 1970년대부터 지금까지 한국이 지적재산권을 침해했다고 주장하는 노래.만화.게임 등의 사례가 즐비하다. 초기 화면엔 "그러고도 한국은 2003년 세계지적소유권 예산위원회 의장국이 됐다"는 비아냥이 떠 있다.

포털 사이트 '라쿠텐(樂天)' 게시판에는 "한국 남자 고등학생의 40%가 치한 노릇을 한 경험이 있고, 4%는 강간을 한 경험이 있다"며 "일본 내에서 재일 한국인에 의한 성범죄가 빈번하게 발생하는 것은 한국인 특유의 성문화 때문"이란 글이 올라 있다. "2002년 월드컵 당시 경기장 건설 비용을 일본이 빌려줬는데 갚지 않고 있다"는 내용은 혐한 사이트의 단골 메뉴다.

도쿄=김현기, 홍콩=최형규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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