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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선지 루트 1만 km] 9. 사막과 초원 갈림길 - 우루무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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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9면

투루판에서 우루무치로 가는 길. 건조하고 따분한 풍경을 바라보며 80㎞ 정도 달려갔을 때 느닷없이 수목이 우거진 마을과 초원이 나타났다. 그 앞으로 기차가 지나고 있다.

끝없이 이어지는 사막, 이따금 나타나는 농촌마을은 뜨거운 햇볕 아래 숨을 죽이고 있다. 양떼가 한가로이 풀을 뜯는 오후, 곧게 뻗은 백양나무 그늘 아래 아낙네가 돗자리를 손질하고 있다. 조용철 기자

우루무치 시내 중심가 서점 앞에서 대학생들이 아르바이트 일자리를 구하고 있다.

신장웨이우얼(新疆維吾爾) 자치구의 주도인 우루무치(烏魯木齊.위구르말로는 우룸치)를 향해 출발했다. 투루판(吐魯番)에서 우루무치까지 가는 200㎞는 바람이 거세기로 소문난 노정이다.

사막 한가운데 일직선으로 뚫려있는 고속도로는 까마득한 먼 곳까지 너무나 곧게 뻗어 있다. 그래서 정면으로 바라보이는 도로의 끝자락이 수직으로 일어서서 하늘과 연결된 것같은 착시를 느낀다.

1999년 완공된 고속도로 왼편에는 광케이블까지 깔려 있다. 차창을 할퀴고 지나는 바람이 차를 떠밀어 사막 한가운데로 내동댕이칠 것 같았다. 모랫벌 밖으로 드러난 바위와 자갈들은 오랫동안 바람에 씻겨간 나머지 걸레로 닦아 놓은 것처럼 반질거렸다.

건조하고 따분한 풍경을 바라보며 80㎞ 정도 달려갔을 때였다. 짙푸른 초원지대가 느닷없이 우리들 시야로 뛰어들었다. 끝간데 보이지 않을 정도로 가없이 펼쳐졌던 초원지대가 한참 만에 뒤로 물러나는가 하였더니 이번에는 드넓은 소금호수(鹽湖)가 나타났다.

우루무치에 도착하자마자 고선지의 흔적을 찾아보기 위해 신장성 박물관을 찾았다. 아쉽게도 내부수리 중이라 유물을 관람할 순 없었다. 다행히 신장성 사회과학원 역사연구소 연구원 쉐쭝정(薛宗正)씨를 만나 고선지 장군에 대해 의견을 교환할 기회를 가졌다. 그는 '돌궐사(突厥史)'등의 저자로 알려진 인물이다.

쉐쭝정에게 당나라 때 고구려 유민들의 이동 경로를 물어보았다. 그는 상세한 설명 대신에 "고선지 일가만 서역에 온 것이 아니라 당시 고구려 유민의 부락과 함께 이동했다"고 짧게 대답했다. 그렇다면 고선지의 군대에는 고구려 유민들이 상당수 포함됐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고선지 장군의 토번 정벌 과정에서 가장 중요했던 임무는 연운보(連雲堡.지금의 아프가니스탄 사르하드) 점령이었다. 토번의 최전방 기지이자 파미르 고원의 중앙에 위치한 난공불락의 요새였던 연운보를 공격해 대승을 거뒀다. 이를 통해 당나라는 서역의 주도권을 잡을 수 있었다. 고선지는 여기서 멈추지 않고 힌두쿠시 산맥을 넘어 소발률국(小勃律國.지금의 북부 파키스탄 지역)으로 진격해 들어갔다. 747년의 일이다. 이 때 고선지는 빙설로 뒤덮인 힌두쿠시 산맥 앞에서 두려움에 휩싸인 부하들을 안심시키기 위해 고도의 심리전을 편다. 자신의 부하 중 일부를 적군으로 위장시켜 투항해 오게 한 일종의 위장전술이다. 위장전술에 투입돼 전투를 승리로 이끌어갈 군인들 가운데 당연히 고구려 유민도 포함됐을 것이다.

쉐쭝정은 "고선지의 아버지 고사계가 안서도호부(安西都護府)의 여덟 명 장군 가운데 한사람이었다. 고사계는 아들 고선지에 앞서 대단한 기량을 갖추었던 장군"이라고 강조하기도 했다. 이어 그는 "당나라는 토번과 돌궐의 침공을 막을 길이 없게 되자 싸움을 잘하는 고구려 유민 부족을 장안의 서쪽 변경지역인 안서도호부 지역으로 강제 이주시켰다"고 말했다.

고구려인은 당시 만주벌판을 누비며 말 잘 타고 활 잘 쏘기로 유명하지 않았던가. 고선지가 원정 때마다 전공을 세웠던 것은 물론 그의 탁월한 역량에 의한 것이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고선지 휘하에 있던 이름없는 고구려 유민 부대원들의 역할이 컸음도 기억해야 할 것이다. 얘기를 확장하면 서역을 정벌함으로써 가능했던 당나라의 성세(盛世)는 고구려 유민들에 힘입었다고 해도 크게 지나친 말은 아니리라.

쉐쭝정은 대화 도중 흑치상지를 고구려인이라고 잘못 말했다. 이에 흑치상지는 백제장군이라고 수정해 알려주자 그는 "흑치상지나 고선지가 같은 민족이라 내가 고려인이라고 한 것"이라고 응대하는 것이었다. 최근 중국 학계 일각에서 '고구려가 중국의 일부'라고 강변하는 게 얼마나 잘못된 허구인가를 중국 학자의 입을 통해 새삼 확인하는 순간이었다.

우루무치 시내를 돌아보면서 곳곳의 건물에서 PC방을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었다. 유행의 정도가 너무 심각해서 학생들이 PC방에 빠져 성적이 떨어질 정도라는 것이었다. 양떼와 초원, 그리고 사막을 연상했던 과거의 신장성이 아니었다.

"도로는 중국의 다른 어떤 성보다 현대화됐습니다." 우리를 안내했던 위구르인 아리무가 고속도로를 달리며 의기양양해서 한 말이다. 비단을 실은 낙타가 타클라마칸 사막을 건너 타림분지를 통과해 투르판.우루무치.카스를 거쳐 유럽으로 갔던 대상들의 모습은 너무나 먼 옛날 얘기가 되어 버렸다. 당나라 현장법사가 화염산에서 손오공을 만나 인도로 향했던 비단길 역시 고속화되어 흔적조차 찾아 볼 수 없게 되었다. 옛 것들은 미련 없이 사라지고, 묻혀지고, 지워진다. 그 위에 새로운 것이 깔리거나 일어서서 언젠가는 자신도 옛것이 되기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아닐까. 눈에 보이지는 않았으나 고속도로에 묻혀 있는 광케이블 역시 언젠가는 그 첨단성이 쇠퇴하여 까마득한 옛것으로 소멸되어버릴 때가 있을 것이었다. 그 재빠른 변화 혹은 변화의 소용돌이를 중국의 서쪽 끝에 있는 변경 도시, 그것도 낙후한 도시로만 여겼던 우루무치에서 발견했다.

신장성에 대한 중국 정부의 발빠른 투자는 그만한 가치가 충분했다. 신장성의 톈산산맥과 쿤룬산맥 사이에 있는 타림분지에는 중국이 21세기 내내 사용할 수 있는 석유가 매장돼 있다고 한다.

위구르인들이 기회만 있으면 독립을 주장하고, 한어 쓰기를 혐오할 정도로 한족에 대한 거부감도 컸다. 아리무의 행동에서도 얼른 발견할 수 있었다. 함께 지낸 5일 동안 그는 한족이 경영하는 식당에는 들어가지 않았다. 멀리 있더라도 위구르인의 식당을 찾았다. 처음에는 무슬림인 그가 돼지고기 요리가 많은 중국식당을 피해서 달아나는 것인가 하였는데, 돼지고기를 내놓지 않는 식당에서도 위구르인 식당을 반드시 찾아가는 것이었다.

김주영(소설가).지배선(연세대 역사문화학과 교수)
사진=조용철 기자 <youngcho@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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