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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선 승리' 시리자 치프라스 당수, 새 총리에 취임

중앙일보

입력

 
그리스 총선에서 승리한 시리자(급진좌파연합)의 알렉시스 치프라스(41) 당수가 26일(현지시간) 새 총리에 취임했다. 그리스 근현대사상 최연소 총리다.

지난 2012년까지만 하더라도 그는 ‘정체불명의 혜성’으로 불렸다. 중도 좌우파가 장악한 그리스 정치지형에 그해 6월 총선에서 돌출적으로 등장해서다. 당시 그가 확보한 의석은 71석이었다. 아테네 차이나타운 칙칙한 건물에 자리 잡은 시리자는 단숨에 제2당이 됐다.

이후 2년6개월이 정체불명의 혜성이 이번엔 권력을 장악했다. 지난 25일(현지시간) 총선에서 전체 300석 중 149석을 차지했다. 과반에서 딱 두 석 모자랄 뿐이다. 득표율은 36.3% 였다. 현 집권당인 신민당을 8.5%포인트 앞섰다. 여론조사에선 3~5%포인트 차였다. 막판 표가 몰린 것이다.

집권에 성공한 시리자는 독립당 등 긴축에 반대하는 세력과 연립정부를 구성하기로 합의했다. 그리스 언론들은 알렉시스 치프라스 시리자 대표가 이날 그리스독립당의 파노스 카메노스 당수와 만나 정부 구성에 합의했다고 보도했다. 1975년 그리스 민주화 이후 40년 동안 이어진 중도 우파-좌파 체제가 막을 내리고 처음으로 급진 좌파가 집권하는 것이다.

◇유로존 질서 뒤흔들다=치프라스가 그리스만 뒤흔드는 게 아니다. 유로존(유로화 사용 19개국) 질서를 뒤흔들 전망이다. 그가 겨냥하는 것은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의 경제 독트린(교리)이다. ‘방만한 국가운영 때문에 재정위기를 맞았으니 고강도 긴축을 통해 부채의 늪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메르켈 원칙을 거부한다는 얘기다. 대신 그는 긴축 조건을 완화하고 구제금융 가운데 일부를 탕감(2차 헤어컷)받기를 원한다.

치프라스가 승리를 확정지은 후 “그리스는 5년간 치욕과 고통을 뒤로하고 새로운 시대를 연다“고 말했다. 이어 ”그리스 국민은 긴축에 반대한다는 분명한 메시지를 보냈다. 어느 누구도 승자로 만들지 않는 공포와 재난의 긴축을 끝내겠다“는 말도 했다.

트로이카는 채권단인 유럽연합(EU)ㆍ국제통화기금(IMF)ㆍ유럽중앙은행(ECB)을 이른다. 치프라스는 이들과의 협상을 통해 대규모 부채를 탕감받겠다는 걸 공약으로 내걸었다. 그리스가 2010년부터 트로이카로부터 지원 받은 구제금융 규모는 2400억 유로(약292조원)에 달한다.

치프라스의 빚 탕감 요구 자체가 유로존 정치지형을 바꿔놓을 수도 있다. 영국 런던대의 코스타스 두지나스 교수는 ”그리스와 같은 작은 나라가 채권단에 맞서 소규모지만 부채탕감을 이뤄낸다면 스페인ㆍ포르투갈ㆍ이탈리아 역시 채권단에 맞설 수 있다“고 말했다. 프랑스의 좌파 진영에선 당장 ”유로존에서도 ‘유럽의 봄’이 시작될 것“(르몽드)라고 반겼다. 올 연말 선거를 치르는 스페인의 포데모스 같은 반(反)긴축 정당도 반색했다. 파블로 이글레시아스 포데모스 대표는 ”희망이 다가오고 있고 두려움이 없어지고 있다“고 말했다.

치프라스의 도전에 대한 메르켈의 응전도 만만찮을 전망이다. 영국 파이낸셜타임스(FT)의 수석 칼럼니스트인 마틴 울프는 최근 본지와의 인터뷰에서 “부채탕감에 대해 독일은 아주 적대적이다. 궁극적으로 메르켈은 독일 정치인이다. 메르켈이‘노(No), 이 문제를 논의하지 않겠다’는 태도를 취할 것 같다”고 말했다. 실제 메르켈은 최근 스위스 다보스포럼에서 “그리스가 유로존에 남기를 원한다. 하지만 부채에 대한 의무와 긴축 약속 등은 준수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양쪽 모두 물러설 수 없는 싸움이다. 유럽 언론은 “판돈이 크게 걸린 포커 게임”이라고 했다. 바로 유로존의 운명이다. FT의 울프는 “(양쪽의 타협 실패가) 그리스를 그렉시트(그리스 유로존 탈퇴) 방향으로 몰 수 있다”고 말했다. 치프라스가 이겼다고 유로존 균열이 생기지는 않겠지만 상황에 따라 그럴 수 있다는 얘기다.

◇2월 28일, 운명의 협상=치프라스-메르켈 대결 1라운드는 벌써 시작됐다. 두 사람이 당장 해결해야 할 발등의 불이 있어서다. 바로 그리스-트로이카 구제금융 프로그램 연장협상이다. 2월28일이 협상 시한이다. 쟁점은 그리스 정부가 올해 발행할 수 있는 국채 한도를 늘리는 일이다. 현재 한도는 연 150억 유로다.

반면 그리스가 올해 갚아야 할 빚은 156억 유로다. 국제통화기금(IMF)에 86억 유로, 유럽중앙은행(ECB)에 70억 유로를 돌려줘야 한다. 모두 구제금융으로 받은 자금이다. 메르켈이 트로이카를 움직여 한도를 늘려주지 않으면 그리스는 국가부도(디폴트)를 선언할 수밖에 없다.
치프라스는 트로이카 대신 유로존 정치 리더들과 통 큰 협상을 원한다. 그는 “채권 금융기관 대표가 아닌 정치적 대표성을 가진 상대와 일괄 타격을 원한다”고 말했다. 한도 확대 협상 자체가 이뤄지지 않고 시간만 허비할 가능성이 엿보이는 대목이다. FT의 울프는 “그리스가 채무불이행을 선언하면 실제 쫓겨날 수 있다”고 말했다. 이는 메르켈이 결코 원하지 않는 사태다. 두 사람 사이에 유일한 공통점이 ‘그리스의 유로존 잔류’이다. 두 사람이 아주 작은 공통 분모를 딛고 서서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유로존 운명이 갈리는 셈이다.

◇한국 금융시장에는 미풍 =국내 금융계에서는 예상대로 그리스 총선결과가 나온 만큼 글로벌 금융시장과 한국증시에 미치는 영향력은 제한적일 것으로 보고 있다. 예고된 악재라서 미풍에 그칠 것이라는 분석이다. 박상현 하이투자증권 수석연구원은 “그리스의 유로존 탈퇴 리스크가 현실화할 가능성은 크지 않아 한국을 포함한 글로벌 금융시장에서 미칠 충격은 제한적일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다만 안전 자산을 선호하는 현상은 당분간 이어질 수 있다”고 내다봤다.

런던=고정애 특파원, 서울=강남규 기자 ockham@joongang.co.kr

☞알렉시스 치프라스=1974년 그리스 아테네의 중산층 집안에서 태어났다. 아테네국립기술대학에서 토목을 전공했다. 80년대에 공산주의 청년조직에서 활동했다. 2006년부터 정치에 나서 2009년에 시리자 당수로 선출됐다. 2012년 총선에서 시리자를 제2당으로 키웠다. 남미 혁명가인 체 게바라를 흠모해 막내 아들의 중간 이름을 게바라의 본명인 에르네스토로 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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