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52) <제79화 육사졸업생들>(205)장창국|학도 의용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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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나라가 위태로울때 학생들이 가만히 앉아있으면 그 민족은 망한다』는 금언이 있다.
6·25가 터지자 각급학교 학생들은 교복과 교모를 착용한채 자원해서 군문으로 뛰어 들었다.
계급도 군번도 없이 오직 조국수호의 일념으로 펜 대신 총을 잡은 그들은 물불을 가리지 않고 전후방에서 적과 싸웠다.
50년7월 대구가 적의 공격을 받을 위기에 처해 있을때 대구시내에는 『조국을 사랑하는 학도여, 조국은 여러분을 부른다. 김석원장군 휘하로!』라는 격문이 나부꼈다.
이틀만에 1백여명의 학생들이 몰렸다. 이들은 육본에서 내준 2대의 트럭을 타고 안동으로 갔다. 당시 안동에는 아군 수도사단(사단장 김석원준장)이 주둔해 있었다.
김석원장군은 학도의용병들에게 『조국을 의해 죽을때가 왔으니 장하게 죽어다오. 적탱크부대가 나타났다. 귀관들이나가 파괴해 다오』라는 당부를 하고 전방지휘소로 나갔다.
학생들은 수류탄 4개씩을 받아들고 탱크가 진출하는 길목에 배치되었다. 그러나 다행히도 적탱크는 아군 대전군포에 맞아 녹아버렸다.
8월초 김석원장군은 수도사단을 백인엽장군에게 넘기고 포항에 있는 3사단장으로 전보되었다.
학도의용병들도 김장군을 따라 나섰다. 이때 적은 대구를 유린하기위해 북괴군 5사단과 12사단병력을 포항과 안강에 총집결시키고 있을때였다.
학생들이 3사단 후방지휘소가 있는 포항여고에 도착한것은 8월10일 하오였다.
11일 상오4시. 갑자기 콩볶듯하는 총소리에 놀라 학생들은 잠이 깼다. 적척후병들이 학교 정문 앞 콩밭까지 접근한 것이다.
학생들은 지급 받은 실탄이 몽땅 떨어질 때까지 M1소총 방아쇠를 당겼다. 적은 수십구의 시체를 남겨둔채 일단 사라졌다가 하오1시쯤 다시 공격을 가해왔다. 실탄이 바닥나 발을 동동구르던 학생들은 수류탄 핀을 뽑아들고 하나 둘씩 적진으로 뛰어들었다. 이전투에서 48명의 학도의용군이 산화했다.
김석원장군은 살아남은 학생들을 집합시켜「학도의용군중대」라고 명명한뒤 갓 임관된 생도1기생 남상선소위를 중대장으로 임명했다. 학도의용병이 처음으로 사단직할부대로 편제를 갖춘것이다. 소대장·분대장도 학생들로 구성됐다. 생도1기생들이 계급장도 없이 생도신분으로 포천지구전투에 투입됐던것과 너무나 흡사했다.
9월15일 유엔군의 인천상륙작전 성공으로 전세가 역전되자 남소위가 이끄는「학도의용군 중대」도 북진대열에 나섰다.
묵호∼강릉을 거쳐 10월2일 38선을 돌파했고 10월12일에는 원산에 입성했다. 학도의용군은 한만국준이 바라보이는 길주까지 진격했다가 중공군의 개입으로 철수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학도의용군은 적이 도망가면서 버리고간 고장난 기관차를 수리, 피난민5백여명을 태워 성진(함북)항에 도착, 마지막 철수선을 타고 부산으로 철수했다. 이때 기관차 운전은 철도고출신 박인표군이 맡았다고 한다.
51년3월16일 정부는 학도병의 복교령을 내렸다.
문교부통계에 따르면 6·25때 학생신분으로 참전한 학도병은 총5만명에 이른다고 한다. 이 가운데 나이가 어려 계급이나 군번을 받지 못한 의용군은 3천명이나 되었고 학도병으로 숨진 사람은 7천명으로 추계됐다.
3사단 학도의용중대를 지휘했던 남소위는 52년 소령으로 진급하면서 11사단에 배속돼 건봉산전투에서 오른팔대동맥이 끊기고 손가락2개가 절단되는 중상을 입고 실신, 영안실로 옮겨졌다가 다시 살아나 화제가 되었다고 한다.
59년 대령으로 퇴역한 그는 현재 성남학교운영재단에 근무하고 있는데 6·25당시 학도병들의 활약상을 담은 『학도의용군』이라는 책을 펴내기도 했다.
이미 고인이된 김석원장군은 55년 서울흑석동 명수대에 「학도의용군 현충비」를 제막, 그들의 넋을 기렸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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