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 법무 지휘권 발동 파문] 거부냐, 수용이냐…김 총장 선택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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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8월 광복절 기념식에서 서로 다른 곳을 쳐다보는 천정배 법무부 장관과 김종빈 검찰총장의 모습이 강정구 교수에 대한 구속 여부를 놓고 벌어진 갈등 상황을 보여주는 것 같다. [중앙포토]

천정배 법무부 장관이 12일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를 받고 있는 강정구 교수를 불구속 수사하라고 김종빈 검찰총장에게 지휘권을 발동함에 따라 이제 남은 관심은 김 총장이 장관의 지휘권을 수용할지 여부다.

김 총장이 천 장관의 지휘권을 거부할 경우 자칫 법무부 장관과 검찰총장의 동반퇴진이나 둘 중 한 사람이 물러나야 하는 사태까지 몰고 올 수 있기 때문이다.

김 총장은 이날 저녁 "(장관이 지휘권을 발동했다는) 보고는 받았지만 (현 상태로는) 묵묵부답"이라고 말한 것으로 전해졌다. 김 총장은 법무연수원에서 예정된 특수수사 담당 검사들과의 만찬도 전격 취소했다. 대검 관계자들은 김 총장의 이 같은 발언을 천 장관이 헌정 사상 처음으로 지휘권을 발동한 것에 내심 불편해 하면서도 앞으로 어떤 선택을 할지 심사숙고하겠다는 취지로 해석하고 있다. 김 총장은 이르면 13일 지휘권 수용 여부를 밝힐 것으로 예상된다.

김 총장이 장관의 지휘권를 수용, 서울중앙지검에 강 교수에 대한 불구속 수사를 지시할 경우에도 파장은 간단치 않다. 대검 공안부와 서울중앙지검 공안부 검사들이 결정한 구속 수사 방침을 승인했던 총장이 갑작스러운 장관의 지휘권에 굴복했다는 비난을 받을 소지가 있다. 이는 검찰 내부에서 김 총장의 리더십에 큰 상처를 입힐 가능성도 크다. 여기에다 야당과 보수층으로부터도 "정치권의 압력을 이겨내지 못했다"는 공격을 받을 수 있다.

이날 저녁부터 대검과 서울중앙지검의 소장검사들은 "천 장관의 지휘권 발동은 현 집권 세력이 국가보안법 폐지를 기정사실화하려는 의도"라며 "총장이 장관의 지휘권을 거부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들은 "비록 장관의 지휘권 발동이 법률 규정에 있다고 하더라도 이런 형태로 사사건건 검찰의 내부 결정을 장관이 뒤집으면 검찰의 정치권 예속은 더욱 가속화될 것"이라고 반발하고 있다. 하지만 김 총장은 장관의 지휘권을 수용하는 방안을 적극 검토 중인 것으로 전해졌다.

반대로 김 총장이 천 장관의 지휘권을 따르지 않고 강 교수에 대한 구속영장 청구를 지시할 경우 상황은 진보적 성향의 법무부 장관과 보수적 성향의 검찰총장이 정면 충돌하는 양상을 띠게 된다.

검찰 관계자들은 김 총장이 일단 장관의 지휘권을 거부하고 강 교수에 대한 구속영장청구를 지시한 뒤 노무현 대통령에게 사퇴 의사를 밝히는 상황도 예상하고 있다.

총장이 장관의 지휘권을 수용하지 않을 수도 있지만 검찰에 대한 지휘권자인 장관의 직무상 명령을 따르지 않은 데 대한 도의적 책임을 질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처럼 김 총장이 사퇴 의사를 밝히는 상황으로 간다면 천 장관의 거취에도 엄청난 영향을 줄 것으로 보인다.

대검의 한 관계자는 "검찰총장이 법무부 장관의 지휘권을 받아들이지 않는 상황에서는 정무직인 법무부 장관도 자신의 지휘권이 거부당한 데 대한 책임을 지고 사퇴할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따라서 천 장관의 지휘권 발동은 김 총장의 수용 여부와 상관없이 정치적 논란을 불러올 것으로 예상된다.

박재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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