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하 20도 계곡 얼음 깨 '식수 확보' … 철책 근무 돌아오면 소초장이 안아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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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용 지프 차량이 위태롭게 질주한다. 얼어붙은 시멘트 길이 차를 자꾸 튕겨낸다. 8일 오전 10시. 강원도 화천 육군 7사단 백랑대대의 힐링소초로 향하는 길. 엔진의 굉음이 메아리처럼 텅텅 울린다. 인기척은 없다.

 이곳은 국토방위의 최전방이다. 능선 너머로 펼쳐지는 뾰족한 3중 철책의 행렬. 도로 양옆으로 삼각형 모양의 표지판이 지나간다. ‘지뢰 위험’. 한국전쟁 때 묻은 지뢰가 드넓은 밭을 이루고 있다. 조수석에 앉은 중대장 박민석(33) 대위가 뒤를 돌아보며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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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기는 GOP(일반 전초) 철책 가운데서도 가장 오지라고 할 수 있습니다. 병사들 부모님에게 이곳을 공개한 적이 있는데 어머니 몇 분이 오자마자 울음을 터뜨리셨어요. 너무 험한 곳이니까요….”

 1시간쯤 달렸을까. 해발 800~1000m 산들 사이에 숨은 깊은 골짜기에 소초 하나가 웅크리고 있는 모습이 보인다. 힐링소초라고 불리는 생활 공간이다. 소초장 양윤승(25) 중위와 부사관·병사들이 생활한다.

 분단된 조국은 국방의 의무라는 이름으로 20대 청년들을 징집한다. GOP는 그 국방의 의무를 혹독하게 짊어져야 하는 곳이다. 소초에서 능선을 따라 양방향으로 늘어선 철책만 해도 그렇다. 소초의 군인들은 철책을 따라 1일 3교대로 40~50도 경사를 오르내린다.

 소초의 아침은 계곡물의 얼음을 깨는 일로 시작된다. 양 중위는 매일 아침 소대원들과 함께 계곡물이 모이는 곳으로 간다. 그곳에서 ‘오함마’라고 불리는 쇠망치로 가로·세로 5m가량의 구멍을 뚫는다. 얼핏 봐도 얼음 두께가 10㎝를 넘는다.

 “여기 얼음을 깨지 않으면 우리는 물론 산꼭대기에 있는 다른 소초의 군인 200여 명이 물을 못 마십니다. 양수기가 여기 있거든요. 양수기를 가동해 800m가 넘는 긴 파이프를 통해 꼭대기로 물을 보내줍니다.”

 소초에서 물을 보내고 파이프에서 물을 빼는 걸 ‘퇴수 작전’이라 부른다. 파이프 속에 있는 물이 얼어붙는 걸 막기 위해서다. 힐링소초가 있는 화천의 1월 평균 기온은 영하 7.2도. 새벽엔 영하 20도를 넘어 설 때도 많다.

 “물을 마시기 위해선 매일 저 두터운 얼음들과 싸워야 해요. 생존 투쟁인 거죠.”

 얼음을 깨고 나면 철책에 교대 근무자 6명이 투입된다. 양 중위가 소초를 떠나는 병사들에게 수류탄과 실탄을 나눠준다. 털컥-. K-2 소총에 삽탄하는 소리가 차례로 들린다. 1인당 75발의 실탄, 수류탄 1개씩을 들고 병사들은 철책을 향해 저벅저벅 걸음을 옮긴다. 혹시 사고라도 날까…. 긴장되는 순간이다. 구타 사건과 총기 난사 사건이 잊을 만하면 일어나는 곳이 GOP다.

 “항상 긴장하죠. 하지만 불안하진 않습니다. 저희 소초 분위기는 정말 좋다고 자부합니다. (소대원들을 보며) 맞지? 얘들아?”

 양 중위가 병사들을 철책 초소까지 데리고 간다. 철책을 따라 이어진 오르막길은 약 1시간 거리다. 숨을 헐떡일 때마다 하얀 입김이 새어 나온다. 초소 근무는 6시간 단위로 돌아간다. 소초장은 근무가 끝난 병사들을 꽉 껴안아 준다.

 점심시간. 근무를 끝낸 몇몇 병사들이 식당으로 들어선다. 김치·김·미트볼·미역국 등을 차례로 떠서 밥을 먹는다. 허기진 병사는 2~3번씩 밥을 먹는다.

 오후 늦게 소대장실에 들어섰다. 침대 두 개와 컴퓨터 한 개가 전부인 아담한 방. 소대장은 스물다섯 살이다. 모니터 상단에는 ‘절대 포기하지 말라’는 사단장 방침이 걸려 있다. 그 아래 가수 아이유와 배우 한지민의 사진이 나풀거린다.

 똑똑똑-.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대원들은 소대장실을 편하게 드나든다. 4~5명이 들러 잡담을 나누다 돌아갔다. 한 병사는 2시간 외출 쿠폰을 달라고 졸랐다. 12장을 모으면 24시간이 돼 휴가를 하루 늘릴 수 있으니 소중한 쿠폰이다.

 “철책 순찰만큼이나 중요한 게 병사들과 친하게 지내는 겁니다. 네이버 밴드나 카카오스토리 같은 SNS를 적극적으로 활용해요. 아들이 어떻게 지내는지 궁금해 하는 부모님들이 정말 많거든요. 여기는 KT 휴대전화만 터져서 결국 통신사도 바꿨어요.”

 양 중위가 최신형 휴대전화를 슬쩍 보여준다. 병사들의 부모들이 네이버 밴드에 올린 글 수백 통이 주르룩 떠 있다.

 ‘강원도에 지금 눈이 또 많이 온다던데 근무하랴 눈 치우랴 힘들지?’ ‘아들, 병장 진급 축하해’. ‘우리 아들이 택배를 잘 받았는지 궁금하네요’.

 부모들이 글을 올렸을 때 양 중위가 소초에 있다면 영상 통화도 연결해준다. 이날 최연준(21) 일병에게 그런 행운이 찾아왔다.

 “(손을 흔들며) 엄마, 잘 지내시죠?”

 “엄마는 잘 있어. 우리 아들 사랑해!”

 화천의 GOP에서 발신된 아들의 영상이 경기도 군포의 엄마에게 전달된다. 통화가 끝나자 최 일병의 코끝이 빨개진다. 점호를 끝내고 양 중위 곁에서 하룻밤을 보내기로 했다. 학군단 출신인 양 중위가 복무를 마치면 소방관 시험을 볼 거라고 이불을 뒤척이며 읊조렸다. 계급은 달라도 힐링소초의 청년들은 저마다 제대 이후의 삶을 걱정하고 있었다.

 다음 날 오전 10시. 탁탁탁-. 탄창을 삽입하는 소리가 아침을 깨운다. 차가운 바람이 북녘 땅에서 불어온다. 바람은 마음대로 넘어다니는 저 철책을 언제까지 총을 들고 지켜야 할까. 병사들은 철책을 향해 다시 가파른 경사를 오르고, 양 중위가 그들의 어깨를 가만히 두드리고 있다.

글=한영익 기자, 사진=강정현 기자

◆다큐리포트 24=이슈가 있는 현장을 1박2일간 세밀하게 들여다보는 다큐멘터리 형식의 기사. 사회적 관심이 큰 현장을 영상 다큐멘터리를 보듯 생생하게 전해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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