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 '15억원 대 0원'…긴급조치로 억울한 옥살이 김지하·설훈 엇갈린 판결, 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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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억원 대 0원’

1970년대 시국사건에 연루돼 ‘억울한 옥살이’를 한 시인 김지하(74)씨와 설훈(62) 새정치민주연합 의원은 똑같이 국가를 상대로 민사상 손해배상 소송을 냈다. 그러나 결과는 김씨 15억원, 설 의원 0원이었다. 왜 이런 차이가 났을까.

서울고법 민사12부(김기정 부장판사)는 설 의원과 그의 가족이 지난해 국가를 상대로 낸 소송에서 당초 “1억400만원을 배상하라”고 했던 원심을 깨고 원고 패소로 판결했다고 21일 밝혔다. 재판부는 “영장 없이 체포ㆍ구금해 수사를 진행하고 유죄 판결을 선고했다 하더라도 당시에 긴급조치가 위헌ㆍ무효임이 선언되지 않았던 이상 이를 불법행위로 보기는 어렵다”고 밝혔다. 이에 따라 국가의 손해배상 책임도 성립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1심은 위헌ㆍ무효인 긴급조치에 따른 유죄 판결은 위법이라고 판단했다. 이번 판결은 지난해 10월 대법원의 판례를 근거로 했다. 긴급조치가 70년대 당시엔 적법한 효력을 가진 법이었기 때문에 이를 근거로 한 수사나 재판 자체를 위법하다고 볼 수 없다는 첫 판결이다.

설 의원과 달리 김씨는 ‘민청학련’ ‘오적필화’ 사건 등으로 6년 4개월 간 치른 옥고에 대한 손해배상 소송 1심에서 지난해 9월 “국가가 15억원을 배상하라”는 취지의 승소판결을 받았다. 법원 관계자는 “설 의원은 단순히 긴급조치 위반으로 유죄 판결을 받았으나 김씨는 긴급조치 외에 반공법, 국가보안법 위반, 내란선동죄 등의 혐의가 적용돼 유죄 판결을 받았다”며 “특히 수사과정에서 감금 및 가혹행위, 증거조작 등 국가의 불법행위가 입증됐고 김씨가 수감생활로 심각한 정신적 피해를 입었던 점이 설 의원과 다르다“고 했다. 하지만 대법원이 긴급조치로 인한 국가의 손해배상 책임을 제한하는 취지의 판결을 한 이상 항소심에서 배상액 규모가 바뀔 수 있다는 분석도 있다.

이번 판결로 긴급조치 국가배상 0원 판결이 줄을 잇는 것 아니냐는 전망도 나온다. 현재 김한길(62) 새정치련 전 공동대표가 부친인 고(故) 김철 전 통일사회당 당수(대표)의 억울한 옥고에 대해 배상하라며 국가를 상대로 낸 소송의 항소심을 앞두고 있다. 이재오(70) 새누리당 의원도 긴급조치로 옥고를 치른 것을 배상하라며 낸 소송의 상고심이 예정돼 있다.

백민정 기자 baek.minjeo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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