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년전 헤어진 부부 불공항서 극적 상봉|중공교포 정상훈씨의 사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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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이렇게 다시 만날수있게될 줄이야…살아있다는게 이토록 중요한 일이구료.』 『하나도 늙지 않고 건강한 모습이라니…도무지 믿을수가 없어요.』
20일하오 파리의 샤를 드골 공항에서는 7순을 바라보는 한국인 노부부가 말을 잊은채 멍하니 서로를 바라보고 있었다.
1950년 6·25동란직후 가족과 헤어져 그동안 중공에서 살아왔던 정상훈씨(67)가 33년만인 이날 부인 김명애씨(62)와 2남2녀의 자녀, 손자·손녀들과 감격스러운 재회를 한것이다.
사변통에 행방불명돼 가족들이 사망신고까지 했던 정씨는 한동안 북한에서 살다가 62년 만주로 건너가 지금은 치치하얼시의 조선족중학교에서 영어와 일본어교사로 일하고있다.
40년, 연희전문문과를졸업한뒤 일본법정대학에서 경제학을 전공했던 정씨는 연전시절 현제명씨가 지도를 맡았던 음악부 합창반에서 이인범·김생려·김생봉· 박창해·김연사(한양대이사장)씨등과 함께 활약하는등 성악으로 이름을 날렸고 농구선수로도 재능을 보였었다.
그는 졸업후 잠시 부산동래중학에서 교편을 잡다가 홍콩과의 무역업에 손을 대기도했다. 가족과의 재회는 정씨가 중공에서 띄운 한통의 편지에서 시작됐다.
정씨는 80년10월 전남광주의 형님댁 주소로 편지를 썼다. 형님은 이미 작고하고 없었으나 친구가 대신 이 편지를 받아 10여년전 파리로 이주해온 가족들에게 연락, 가까스로 서로의 소식을 알게됐다.
이후 파리∼치치하얼간의 10여차례의 서신왕래끝에 최근 파리의 자녀들이 초청장과 비행기표를 보내 재회가 이루어졌다.
현재 정덕선으로 개명, 중공국적으로 있는 정씨는 82년초 여권을 발급받았고 최근 프랑스정부의 비자가 나왔다.
그동안 가족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정씨는 간혹 북한에서의 암담했던 일들을 회고하곤 자손들에겐 이같은 비극이 다시 없도록 진실하고 참되게 살도록 노력해야 한다고 말했으며 사는날까지 성의껏 조국을 위해 일해야겠다고 다짐하기도 했다.
그는 또 만주로 와선 흑룡강성의 한 농촌에서 농사를 짓고 살다가 4인방이 넘어진뒤 78년 치치하얼의 조선족 중학교에서 교편을 잡게돼 생활이 나아졌다고 말하고 중공이 이제 개방을해 인재를 대량으로 양성하고있으며 그들의 생활도 2∼3년전보다 크게 향상됐다고 전하기도했다.
10년전 정부로부터 독립유공자로 추서됐던 정효용씨의 자제인 정상훈씨는 한국계 중공작곡가 정열성씨의 조카이기도하다.
중공작곡가로 널리 알려진 정씨의 미망인 정설송씨는 연안대학을 나온뒤 신화사통신 평양특파원으로 있을때 정씨와 만나 결혼했으며 지금은 중공의 유일한 여성대사로 덴마크주재대사로 있는것으로 일려졌다.
이날 꿈에 그리던 가족들과 상봉의 기쁨을 나눈 정상훈씨는 가족과 헤어진뒤 한국여성과 재혼해 치치하얼에 1남2녀를 두고있으나 기회가 주어지면 고향에 가보고 싶다고 말했다. <파리=주원상특파원>
▲농구원로 이성구(72)씨=정군이 살아있다니 꿈만같다. 30년대 연전농구전성시절 1m75cm의 키로 날렵하게 슛을 쏴대며 골게터로 활약하던 장면이 눈에 선하다. 해방후 부산에서 고무신공장을 하여 여유가 있었는데 6·25사변후 그만 소식이 끊기고 말아 궁금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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