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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 생각이 다름을 인정했으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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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신예리
신예리 기자 중앙일보 차장
신예리
JTBC 국제부장·밤샘토론 앵커

치약 때문에 사람이 싫어지기도 한다. 치약을 튜브 끝부터 짜서 쓰는 남자는 튜브 중간부터 푹 눌러 쓰는 여자를 좀체 견디기 힘들다. 치약 쓸 때 드러나는 무신경과 무절제를 참을 수가 없는 거다. 남녀 사이에 치약은 결코 사소한 문제가 아니다.

 그럼 종교는 어떨까. 치약보단 분명 중한 사안일 텐데 주위를 둘러보면 ‘사랑의 힘’으로 이겨낸 경우가 적잖다. 착실히 교회 다니란 장인 말에 순종해 결혼에 골인하고 집사까지 된 후배, 마지못해 아내 손 잡고 주일 예배 가주는 걸로 편안한 노후를 예약했다는 선배까지…. 신앙의 자유와 가정의 평화를 맞바꾼 실례들을 종종 마주친다. 비약일지 모르나 우리네 종교 갈등이 그로 인해 유혈 테러까지 판치는 바다 건너 나라들엔 못 미치기 때문은 아닐는지.

 갈등 유발 수위로 치자면 종교보다 외려 정치가 몇 급 위란 느낌이다. 진보와 보수가 서로 ‘일베’니 ‘노빠’니 하며 피차 상종 못할 인종으로 치부한 지 오래니 말이다. 정치가 이성 관계의 주요 변수가 된 까닭이다. 한참 어린 직장 후배들과 SNS 친구 맺고 연애 문제까지 시시콜콜 아는 체하는 ‘간 큰’ 선배이다 보니 주워들은 사연만 봐도 그렇다.

 몇 차례의 짧은 만남과 헤어짐 끝에 난생처음 진득하게 사귀는 남자친구가 생긴 후배 A. 딱 한 가지 안 맞는 게 바로 정치적 성향이라 했다. 진보를 자처하는 그녀와 달리 “학생 땐 진보가 무작정 멋져 보이겠지만 사회 나와서도 진보라는 인간은 한심하다”는 그 남자. 갈수록 고민이 깊어진단다.

 또 다른 후배 B는 아예 정치색이 다른 여자와는 만날 수 없다고 선을 긋고 산다. 번번이 싸울 일이 지레 피곤해서다. 직업의식을 발휘해 예리한 질문을 던져봤다. “그 여자가 스칼렛 요한슨인데도?” 잠시 고민하던 B, 정말 아쉽다는 표정으로 그래도 할 수 없단다.

 정치가 밥 먹여주는 것도 아니고 (간혹 밥벌이에 도움되는 정치도 있긴 하다만) 왜들 이러는 걸까. 그 답을 어림해볼 수 있는 실험 결과가 지난해 미국에서 나왔다. 사람들은 비슷한 정치적 성향을 가진 이의 겨드랑이 체취조차 매혹적으로 느낀다는 거다. 설마? 진짜다. 브라운대 연구팀이 남녀 21명의 겨드랑이에 하루 동안 붙였던 거즈를 수거해 유리병에 담았다. 그 냄새를 맡게 했더니 진보는 진보의 냄새에, 보수는 보수의 냄새에 “향기롭다”는 반응을 보였다는 거다. 반대쪽 체취엔 “역겹다. 내다버리라”란 소리가 나왔고.

 연구팀도 딱 부러지는 이유를 대지 못했지만 한 가지는 분명하다. 사람들은 같은 정치색에 본능적으로 끌린단 점이다. ‘진보노동당’ 여성 의원과 ‘새한국당’ 남성 의원이 급속히 사랑에 빠진다는 이응준의 소설 『내 연애의 모든 것』은 그야말로 소설일 뿐인 거다.

 남녀 사이야 싫으면 안 사귀어도 그뿐이지만 어쩔 수 없이 한 나라에 살며 사사건건 편 갈라서 물고 뜯고 싸우는 세태는 어찌해야 할까. 밤새 생방송으로 진행하는 TV 토론 프로의 사회자로서 가장 답답한 것도 그런 순간이다. 상대편 말은 무조건 “안 들려” “안 믿겨”라며 누가 누가 더 크게 소리 지르나 경쟁하는 걸 지켜볼 때 말이다. ‘시청률의 제왕’이라면 반색할지 모르나 솔직히 난 긴긴 토론 끝에 실낱 같은 소통의 가능성을 발견할 때 도리어 짜릿한 희열을 느끼곤 한다.

 ‘Let’s agree to disagree’란 영어 표현이 있다. 의역하면 ‘너와 나의 생각이 다르다는 걸 인정하자’ 쯤 될 게다. 의견 충돌이 끝도 없이 이어져 토론이 앞으로 나아가지 못할 때, 이쯤에서 다음 단계로 넘어가자며 꺼내 드는 말이다. 우리 사회에서 쓸데없이 소모적인 논쟁이 불거져 서로를 죽도록 할퀼 때마다 내가 외치고 싶은 소리이기도 하다. 제발 그만 좀 하자고, 더 해서 득 될 게 뭐냐고.

 “관용을 보이지 못하는 건 자신의 대의명분에 확신이 없기 때문이다.” 마하트마 간디는 일찍이 설파했다. 혹 우리 사회의 분열을 조장하는 그들도 자기네 노선에 대한 믿음이 부족한 건 아닌지…. 그렇지 않다면 이제라도 쿨하게 서로 다름을 인정하고 나서는 건 어떨까. 이해가 안 된다고 인정까지 못할 건 없잖은가.

신예리 JTBC 국제부장·밤샘토론 앵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