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문영의 호모 디지쿠스] 디지털세상 신인류 '덕후' 취미 넘어 몰입을 즐긴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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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 경산에서 레스토랑을 운영하는 조웅씨는 수집형 덕후다. 그동안 모은 피겨·영화 소품 1만 점으로 매장을 꾸몄다.
박원연 대표

네티즌들이 번역해놓은 놀라운 용어 중 하나가 ‘덕(德’)이다. 영어로는 매니어를 뜻하고 일본어로는 오타쿠인데, 어감이 약간 다르다. 일본의 오타쿠에 비해 우리나라 인터넷의 ‘덕’은 더 맛깔스러워졌다. 덕은 두 글자로 ‘오덕’, 세 글자로 ‘오덕후’라고 하기도 한다. 요즘에는 ‘오’를 뺀 ‘덕후’라는 말이 일반명사화됐다. 무엇인가를 열정적으로 좋아해서 전문가 수준이 되면 그는 ○○덕후가 된다.

 알다시피 동양철학으로서의 덕에는 노력과 수양의 의미가 포함된 가치관이다. 그래서 덕후는 무엇인가에 빠져 정신을 잃은 편집광이나 도착, 중독자와는 다르고 맹목적 추종자이자 논쟁을 즐기는 ‘빠’와도 사뭇 다르다. 네티즌들이 말하는 ‘덕후’란 유명한 심리학자 미하이 칙센트미하이가 말하는 ‘몰입’에 빠진 경지를 스스로 통제하고 즐기는 전문가다. 그것이 비록 남들이 보기에는 하찮은 피겨나 만화, 정보기술(IT) 제품이라 할지라도 덕후에게는 탐험의 세계이자 풍류가 된다.

 덕후의 대상이 되는 것들은 대체로 만화와 애니메이션이다. 하지만 남자들의 3대 집안 몰락형 취미라는 자동차·카메라·오디오를 비롯해 군사 무기·자전거·레고·패션·음악·음식까지 실로 그 범위가 무궁무진하다. 무엇인가에 대해 모든 것을 알고, 모든 것에 대해 무엇인가를 아는 사람. 이것이 디지털 세상의 전문가이자 교양인인데, 덕후들이 바로 그들이다.

 고가의 취미 제품을 과시하는 유형은 덕후로 치지 않는다. 돈만 많을 뿐 ‘덕’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남과 다투어 싸우는 것은 ‘덕’의 기준이 아니다. 덕후에게 취미의 대상은 인터넷 용어로 ‘케바케(Case by case)’다. 사람마다 다름을 인정한다. 이런 점에서 덕후들은 자신의 취미를 강요하거나 남과 비교하지 않는다. 그 자체로 즐긴다. 그렇다고 집착해서 본업을 폐하거나 가정에 분란을 일으키지도 않는다. 취미 생활의 일부분이고 비용은 배우자의 허락 범위 내로 한계가 분명하다.

 즐기는 방법 또한 닥치는 대로 모으는 수집형, 어원부터 기능·종류 등을 파고드는 연구형, 최신 트렌드와 업계 동향을 살피는 관찰형 등으로 다양하다. 여기 50대 사업가의 덕후질 사례를 보자.

 인터넷 솔루션 개발업체 대표인 박원연 대표는 사적지 덕후다. 지난 5년 동안 매 주말 단 한 번도 빠지지 않고 전국의 독립유공자, 남북 분단 관련 사적지를 찾아가 자료를 수집하고 기록에 남기는 일을 하고 있다. 전국에 흩어져 있는 이런 사적지들은 문화재가 아니어서 국가에서도 관리하지 않고 시민들에게도 잊혀져 가고 있다.

 그는 각종 기념비의 크기·모양·재질·위치를 가장 잘 분석하고 이해하는 전문가다. 우리 근현대사의 기록이 담겨 있는 각종 기념비들의 사진과 위성위치확인시스템(GPS) 정보, 비문 등을 모두 데이터베이스(DB)화하고 있다. 지금까지 구축한 정보만 4022곳, 사진 수만 4만6337장이다. 무엇이 있는지 몰라서 못 갈 뿐, 어디에 있는 줄만 알면 끝까지 찾아간다. 이쯤 되면 사적 기념비 분야에서는 대한민국 최고의 사적지 덕후다.

 사적지 중에는 좌익에 의해 희생된 사람들, 우익에 의해 희생된 사람들, 아버지가 세운 아들의 위령비, 충견을 위한 비, 잊혀진 의병들의 기념비 등 사연도 많다. 기념비 성격상 좌우 이념에 의한 극단적 사례가 많지만 “딸 흰머리 뽑고, 며느리 검은 머리 뽑으면 대머리밖에 안 남는다”고 한다. 이념 구분 없이 모두 기록에 남기겠다는 덕후다운 열정이다.

 그가 구축한 정보는 대개의 덕후들이 그렇듯이 아낌없이 모두 인터넷에 공개하고 있다. 문화재청은 못해도 덕후는 한다. 덕 없는 인터넷은 덕뿐만 아니라 멋도 없다.

임문영 seerlim@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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