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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악재 만났다" 삼성 당혹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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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 실권된 CB 배정이 발단=삼성에버랜드는 1996년 10월 자본금을 늘리기 위해 CB 99억5000만원어치를 주당 7700원에 전환할 수 있는 조건으로 발행했다. 그러나 제일제당을 제외한 에버랜드의 기존 주주였던 계열사들이 CB 인수를 포기해 CB의 97%가 실권됐다. 실권된 CB는 그해 12월 에버랜드 이사회 의결을 거쳐 이건희 삼성 회장의 네 자녀가 인수했다. 이 회장의 장남 이재용 삼성전자 상무는 이 CB를 주식으로 전환해 지분 25.1%를 가진 대주주가 됐고, 이 상무의 세 여동생(부진.서현.윤형씨)은 각각 8.37%를 보유하게 됐다. 에버랜드는 에버랜드-삼성생명-삼성전자-삼성카드 등으로 이어지는 삼성 지배구조의 정점으로 사실상 그룹의 지주회사다. 이에 대해 참여연대 등 시민단체들은 편법 상속이라고 문제를 제기했다. 삼성 계열사들이 짜고 CB 인수를 포기함으로써 이 상무를 에버랜드의 대주주로 만들었으며, 이 과정에서 에버랜드 경영진은 CB를 헐값에 넘김으로써 회사에 손실을 초래했다는 주장이다. 이 문제는 참여연대 등이 CB 발행을 담당했던 허태학 당시 에버랜드 사장 등을 배임 혐의로 검찰에 고발함으로써 형사사건으로 번졌다.

◆ 삼성 측 "승복 어렵다"=삼성은 이번 판결로 경영권 승계를 둘러싼 도덕성 논란과 함께 기업 이미지 타격이 예상돼 침통함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 하지만 이번 판결 자체에 대해서 삼성 측은 승복하기 어렵다는 분위기다. 쟁점은 크게 ▶CB 발행의 목적 ▶CB의 적정 가격 ▶배임죄 성립 여부 등이다. 법원은 CB 발행이 이재용 상무에게 에버랜드의 지배권을 넘겨줄 의도로 이뤄졌다는 검찰 측의 주장을 받아들였지만, 삼성 측은 자본금 확충 및 부채 비율 인하를 위한 조치였다고 반박하고 있다. 삼성 관계자는 "당시 계열사들이 CB 인수를 포기한 것은 경영상 불요불급한 증자에 참여하지 않겠다는 자체 판단에 따른 것이지, 특정인에게 지분을 넘기기 위한 것은 아니었다"고 주장했다. CB 값도 관련법이 정비되지 않은 당시 상황에서 어쩔 수 없이 객관적인 외부 평가기관에 의뢰, 주당 자산가치(장부가액)를 따진 뒤 이보다 10% 비싼 액수로 결정했다는 것이다. 삼성은 설령 CB 저가 발행이 인정된다 해도 법리상 회사가 아닌 실권 주주들의 손해인 만큼 회사에 대한 배임죄가 성립하지 않는다는 주장도 펴고 있다. 법원은 배임죄를 인정하기는 했지만, '적정 주가를 판단하기 어렵기 때문에 회사의 손실액을 계산할 수 없다'며 주당 8만5000원이라는 검찰의 주장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 지배구조에 당장 타격은 없을 듯=재계는 이번 판결에도 불구하고 삼성의 지배구조 자체에는 당장 별문제가 없을 것으로 분석하고 있다. 96년 발행된 에버랜드 CB를 무효화하지 않는 이상 이재용 상무 등의 지분은 법적으로 유효하기 때문이다. CB 배정이 형사적으로 유죄 판결을 받았지만, 에버랜드와 이재용 상무 간의 계약은 별도 사건이라는 것이 법조계의 대체적 견해다. 에버랜드 주주들이 모두 이 회장 일가와 삼성 계열사 및 임직원들이어서 이들이 이사회 결의에 이의를 제기할 가능성도 거의 없어 보인다. 검찰도 "CB 발행 무효화는 민사 문제이기 때문에 검찰이 간여할 사안은 아니다"는 입장을 밝힌 바 있다.

이번 판결로 증여세 문제가 쟁점이 될 가능성은 있다. 국세청은 법원 판결에 대해 배임 혐의가 과세 요건에 해당되는지는 따져봐야 할 문제라며 신중한 입장이다. 그렇지만 CB를 저가로 발행해 지분을 확보한 것에 대해서는 현행법상 소급 적용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증여세를 추가로 물리기는 힘들다는 것이 국세청의 설명이다. 국세청 관계자는 "당시에 과세 근거가 없어 세금을 부과하지 못한 것"이라며 "그 뒤 법이 보완됐더라도 이를 소급해 적용할 수는 없는 데다 법률적 시효도 지나 과세가 불가능한 것으로 알고 있다"고 말했다.

이현상 기자

◆ 전환사채(CB.Convertible Bond)=발행 후 일정 기간이 지난 뒤에 사채 매입자의 선택에 따라 미리 결정된 조건대로 주식으로 전환할 수 있는 특약이 있는 사채.

◆ 실권주=회사가 유상증자를 행할 때 신주 인수권자가 자신에게 배정된 주식을 포기함으로써 주금이 납입되지 않은 주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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