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 찾은 옛 동료 극적 재회|회견장서 12년만에 엄정수씨 만난 신 대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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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신종철씨 아니오!』
『엄정수…, 죽었다던 당신이 살아있다니 이게 꿈이요, 생시요?』
『신형, 잘 왔소. 정말 잘 왔소….』
두 사나이는 와락 부둥켜안고 눈을 감은 채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17일 상오 서울귀순용사 신중철 대위의 기자회견장은 12년만의 옛 전우 상봉으로 더욱 극적인 순간을 연출했다. 회견장에 모였던 많은 사람들도 너무도 극적인 두 사나이의 재회에 콧등이 시큰했다.
두 사람의 대화는 한참만에 다시 이어졌다.
▲엄=『그래 얼마나 고생이 많았소. 신형이라면 너끈히 해내리라 믿었지만 막상 지난 7일 38선을 넘은 사람이 신형이라는 뉴스를 듣고는 나도 놀랐죠.』
▲신=『고생 많았죠. 이제 산 것 같군. 당신은 벌써 죽은 줄 알고있었소. 당신이 월남한 뒤 놈들은 남에서 당신을 6개월 동안 이용할 대로 이용하고 각을 떠 죽였다고 했더랬는데….』
▲엄=『하하…. 그 애들의 상투선전 아닙니까. 죽긴….장가들고 아들 둘 낳고 잘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같은 군에 있던 지용이는 어찌됐습니까.』
▲신=『그 애는 그후 군관이 돼 후방으로 전출갔지. 그리고 엄형 월남 후 웃놈 수십명이 줄줄이 목이 달아났지….』
이날의 주인공 심중철 대위와 감격적인 상봉을 한 엄정수씨(33)는 15년 전인 71년 6월부터 71년7월까지 강원도 창도군 북괴 민병대(13사단 8중대 2소대 2분대)의 같은 중대 같은 소대에서 같은 사병으로, 같은 부대 대표권투선수로, 같은 순찰조로 형제처럼 지낸 전북괴 전우.
엄씨는 북괴군 생활3년에 도저히 배겨날 길이 없다고 판단, 71년7월25일 동부전선의 비무장지대를 넘어 귀순, 지금은 중견 북한문제전문가로 일하고있다.
신 대위는 그 후 그 부대에 3년 더 있다가 군관학교를 1등으로 졸업, 중위에 임관되고 다시 김일성군사대학을 나와 상위가 됐다. 81년에는 옛날 엄씨와 근무했던 13사단 민경대 참모장(대위)이 돼 돌아왔다.
두 사람이 만난 것은 지금부터 15년 전인 68년 6월. 신 대위 스물 하나, 엄씨는 열여덟살 때. 신 대위는 고건원고등광업학교를 마치고 67년 입대, 68년 3월에 민경대에 배속됐고 엄씨는 68년 평양고등물리학교를 졸업하고 곧바로 북괴군에 끌려나가 이 부대에 배속됐다.
당시 신씨는 이미 상등병이 돼 있었고 엄씨는 전사(훈병에서 1등병 사이의 계급). 이어 신씨가 하사가 됐을 때는 엄씨가 상등병이 됐다.
두 사감은 지용이라는 다른 동료와 함께 고달픈 군 생활을 조금이라도 잊기 위해 권투와 농구 탁구에 열을 올렸다. 이 덕분에 신씨는 13사단에서 주먹이 가장 센 선수가 되고 북괴대표선수선발전에까지 나갔었다.
신씨와 엄씨는 다같이 IQ 1백30이 넘는 머리로 중대 안에서 공산주의이론에 가장 밝았다. 세 사람은 배가 고프면 밥 공장에서 누룽지를 챙겨 비무장지대순찰 때 나누어 먹곤 했다.
그러다가 71년 엄씨는 쥐도 새도 모르게 귀순했다. 특수부대장으로 있던 엄씨의 아버지가 뚜렷한 이유 없이 문책퇴역을 당하자 공산주의에 회의를 느끼게됐으며 아버지로부터 간간이 들은 남한의 실상을 동경했던 것이 귀순의 동기였다. 신씨와는 간혹 공산주의의 모순을 이야기하기는 했으나 월남결심을 털어놓을 용기는 차마 나지 않았다.
엄씨가 월남한 뒤 신씨도 작년 8월 월남귀순을 결심, 엄씨를 다시 생각했다고 한다.
귀순 후 맨 먼저 「엄정수」를 찾았으며 관계사는 『엄씨가 얼마 후 당신 앞에 나타날 것』 이라고 귀띔하더라는 것.
엄씨는 귀순 후 한양대전자공학과를 졸업하고 요즘 대학원입학준비를 하고 있다. 『신형, 옛날처럼 함께 공부해 함께 일합시다.』
『좋습니다. 나도 그럴 생각입니다. 그리고 우리 옛날처럼 형제 합시다.』
두 사람은 껴안으며 활짝 웃었다. 살붙이는 아니지만 결코 외롭지 않은 듯 했다. <신종수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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