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산업화·민주화 이끈 아버지, 1000만 관객이 함께 품은 것"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08면

‘국제시장’의 덕수(왼쪽 사진)는 자식을 위해 한 몸을 바친 산업화 세대 표상이다. ‘변호인’의 송우석 변호사(오른쪽 사진) 역시 자식들에게 올바른 사회를 물려주기 위해 자신을 내던졌다.

영화 ‘국제시장’(윤제균 감독)이 13일 1000만 관객을 넘어섰다. 개봉 28일 만이다. 덕수(황정민)라는 한 가장이 흥남부두 철수, 독일 광산, 베트남 전장 등 한국 현대사의 현장을 온몸으로 겪어내는 스토리에 많은 관객이 울고 웃었다. 하지만 일각에선 한국 현대사의 한쪽을 부각시킨 ‘우파’ 영화라는 비판도 있었다. 지난해 비슷한 시기에 1137만 관객을 모았지만 ‘좌파 영화’라는 비판을 받은 영화 ‘변호인’(양우석 감독)처럼 이념 논쟁에 휘말린 것이다. 이 두 영화는 정치적인 또는 정치적으로 편향된 영화일까? 윤제균·양우석 두 감독을 함께 만났다.

윤제균 감독(왼쪽)과 양우석 감독(오른쪽)은 두 아버지를 통해 시대를 말했다.

 - 양우석 감독은 ‘국제시장’을 어떻게 봤나.  양우석(이하 양)=우리 사회에 꼭 필요한 영화다. 우리의 현대사를 반추하는 좋은 기획이다. 폐허에서 시작해 여기까지 이뤄낸 우리의 역사를 한 남자의 삶에 담아낸 건 놀라운 영화적 성취다. ‘변호인’도 ‘국제시장’도 망각돼가는 가치를 반추시킨다는 점에서 같은 영화다.  - 어떤 의미인가.  양=‘변호인’이 민주화의 가치를 일깨워줬다면 ‘국제시장’은 산업화에 기여한 세대의 노력을 잊지 말아야 한다는 메시지를 전한다. 그 세대가 술의 힘을 빌리지 않고는 얘기하기 힘들었던 고생담을 영화가 적확하고 감동적으로 전달해줬다. 우리 사회의 가장 큰 문제는 망각이다. 잊혀져선 안 될 소중한 가치들을 잊지 않게 한다는 점에서 ‘변호인’과 ‘국제시장’은 같은 지점을 보고 있다.  - 윤제균 감독도 같은 의견인가.  윤제균(이하 윤)=그렇다. ‘국제시장’의 출발점은 일찍 돌아가신 아버지에게 바친다는 개인적 이유였지만 결국 덕수로 대표되는 산업화 세대에 대한 헌사가 됐다. 그분들이 돌아가시기 전에 빨리 뭔가 만들어야겠다는 생각도 있었다.

 - 허구의 인물이 주인공인 ‘국제시장’과 달리 ‘변호인’은 실존 인물을 다뤘다.  양=나는 격동의 1980년대를 두 인물을 통해 이해했다. 군부독재의 서슬이 퍼렇던 80년대 초 민주화 운동과 가장 거리가 먼 것 같던 한 변호사가 어떤 사건을 계기로 민주화 운동에 뛰어들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다. 그리고 또 한 명은 고도산업화와 정보화의 기초를 닦아준 김재익(83년 미얀마 아웅산묘역 테러사건으로 사망) 전 청와대 경제수석이다. 그들 덕분에 80년대 민주화와 고도산업화를 동시에 이뤄낼 수 있었다. 김 전 수석의 이야기를 영화화하는 데 관심이 많았지만 ‘변호인’을 먼저 내놓게 됐다.  -‘국제시장’은 현대사의 정치적 사건을 배제했는데, 그런 선택 자체가 정치적이라고 보는 시각도 있다.  윤=3대가 함께 볼 수 있는 가족영화를 만들려고 했다. 그래서 민감하고 불편하게 느껴질 수 있는 정치 소재를 뺀 거다.  -‘변호인’을 정치적인 영화로 보는 이들도 있다.  양=난 ‘변호인’을 정치적인 영화로 생각하지 않는다. 80년대를 치열하게 살았던 한 인물의 실존과 당시 그를 둘러싼 환경을 잊지 말자는 얘기를 했을 뿐이다. ‘변호인’ 또한 그 시대를 치열하게 살았던 한 아버지의 얘기다. 그 시대를 모르는 젊은이들이 영화를 통해 소통할 수 있기를 원했다.  -‘국제시장’ 또한 세대 간 소통이 이뤄질 수 있는 영화인데.  윤=젊은이들이 아버지와 할아버지 세대를 이해하는 계기가 되길 바랐다. 젊은이들이 ‘우리도 못지않게 힘들게 살고 있다. 우린 희망조차 없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런 지적이 세대 간 소통의 단초가 될 수 있다고 봤다. 보수·진보 논란에 휩싸일 줄은 생각도 못했다.  양=‘국제시장’도 ‘변호인’처럼 좌와 우, 진보와 보수로 양분하는 프레임 논란에 휘말렸다. 우리 사회는 어떤 사건을 문맥상에서 이해하지 않고, 단어와 문장 몇 개로 특정 프레임에 넣어 규정하는 프레임 논리가 횡행하고 있다. 나도 ‘국제시장’을 보고 서운함을 느끼는 이들이 있다면 진보 쪽이 아닌 젊은 세대일 거라고 봤는데 예상이 어긋났다.  - 세대 간 논쟁은 이슈가 되고 있지 않다.  양=‘국제시장’의 흥행 못지않게 비정규직 젊은이의 애환을 그린 드라마 ‘미생’이 폭발적 호응을 얻은 의미를 곱씹어야 한다. ‘국제시장’ 세대와 ‘미생’ 세대 간의 논란이 보수·진보 논란보다 훨씬 생산적이다.  윤=‘국제시장’이 진영 논리에 매몰돼 ‘변호인’과 비교되는 것은 우리 사회가 건강하지 못하다는 방증이다. 우리 사회의 비극이다.  - 영화까지도 프레임 논란에 휘말리는 우리 사회의 문제는 어디에서 비롯됐다고 보나.  양=이해와 연민을 통해 화합을 만들어내는 에너지보다 갈등을 통해 만드는 에너지가 이득이 된다고 보는 세력이 있기 때문이다. 힐링보다는 갈등이 자신들에게 유리하다고 보는 이들이다. 그래서 자꾸 프레임 논란에 불을 붙인다.  윤=보수든 진보든 서로 이해는 못하더라도 인정은 해야 한다. ‘국제시장’의 덕수는 자식들이 자신보다 덜 고생하는 사회에서 살게 하고 싶다는 욕구 때문에 뼈 빠지게 일한다. ‘변호인’의 송우석 변호사는 자식들이 좀 더 정의로운 사회에서 자라게 해야겠다는 가치관 때문에 개인적 영달을 포기한다. 두 가장 중 누가 옳고 누가 틀리다고 할 수 있겠나.  - 산업화와 민주화는 서로 대립하는 가치가 아니라는 말로도 들린다.  양=두 가치는 절대로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다. 민주화의 산업적 가치는 어마어마하다. 그리고 민주화는 어느 정도의 산업화가 바탕이 되지 않으면 이뤄지기 힘들다. 두 영화 모두 1000만 영화가 됐다는 건 국민이 편향적인 시각으로 보지 않았다는 뜻이다. 우리 국민은 두 영화의 가치를 모두 품에 안는, 묵묵한 바다와 같다. 바람이 불면서 파도가 이리 한 번 저리 한 번 치는 것일 뿐 정작 바다는 움직이지 않는다.”  -‘국제시장’의 후속편에 대한 생각은 없나.  윤=시나리오 초고는 민주화 운동까지 포함하는 방대한 내용이었다. 하지만 그 많은 걸 영화에 담아낼 수 없었다. 다음엔 덕수 가족이 민주화가 화두였던 80~90년대를 헤쳐가는 모습을 그린 영화를 만들고 싶다. ‘변호인’처럼 가족 중 누구 하나가 민주화 운동에 연루되는 내용일 수도 있다.  - 양 감독은 평소 산업화 세대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갖고 있었나.  양=나 또한 그 세대에 관심이 많다. 요즘 라면에 대한 영화를 구상 중이다. 인스턴트 라면을 통해 우리의 초창기 산업화 시대 얘기를 하고 싶다. 라면은 먹고사는 문제를 해결해준 값싼 식품이다. 기업인도 구휼을 목적으로 라면을 만들었고, 박정희 대통령도 라면 개발에 관심이 많았다. 기회가 주어진다면 김재익 전 수석을 중심으로, 절대악으로만 여겨졌던 5공화국의 공과 과를 재조명하는 드라마도 하고 싶다.  - 윤 감독은 대학 시절 시대에 대한 고뇌를 느낀 적이 없나.  윤=입학할 때 아버지가 절대 데모만은 하지 말라고 신신당부했다. 2학년 때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과외 아르바이트로 등록금을 벌며 친구 집에 얹혀 살았다. 대학 시절 내게 민주화보다 더 큰 화두는 먹고사는 것이었다. 영화 속 덕수처럼 말이다. 민주화 운동을 한 친구들에 대한 미안함, 시대에 대한 부채의식도 느끼고 있지만 나의 삶이 틀렸다고 할 순 없지 않나. 그들과 다른 삶을 살아왔을 뿐이다.  - 두 영화를 본 관객들이 공통으로 느끼는 정서가 있을까.  양=미안함과 감사함, 연민이라고 생각한다. 그 대상이 특정 인물이냐 특정 세대냐의 차이만 있을 뿐 관객이 느끼는 감정은 비슷하다고 본다.  윤=극단에 치우친 댓글들에 흔들리지 않았으면 좋겠다. 우리 관객들은 균형감각을 지닌 똑똑한 사람들이다.

정현목 기자 [사진 김진솔(STUDIO 706), 각 영화사] [미디어스파이더] 영화 '국제시장' 흥행 스토리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