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07)제79화 육사졸업생들|한·일관계 개선추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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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민정이양 계획을 밝힌 소위 「8·12성명」 이후 김종필씨는 한일간의 관계개선을 추진하기 시작했다.
과거 자유당정권때나 민주당정권때도 일본과 관계개선의 필요성을 누구나 인정했으나 한일간의 특수한 역사적 유산때문에 선뜻 발벗고 나서는 사람이 없어 담보상태에 머무르고 있었다.
그러나 혁명정부는 62년 1월 발표했던 1차5개년계획의 수행을 위해서는 일본과의 관계개선을 하지 않을수 없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던것 같다.
당시 최고회의 주변의 분위기도 한일국교정상화를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이런 상황속에서 김종필중정부장이 『내가 제2의 이완용이 되는 한이 있더라도 한일문제만은 해결해야 된다』며 직접 외교교섭에 나섰다.
61년 11월11일 박정희의장은 미국 「케네디」대통령과 면담을 위해 출국하는 길에 일본에 들러 「이께다」(지전용인) 당시 일본수상과 2차례 회담을 가졌다.
이 회담에서 논의된 내용은 발표가 없어 알길이 없으나 주로 재산청구권 및 평화선문제 등 현안문제의 해결을 위한 정치적 타협을 모색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김종필중정부장이 한일문제 타결에 발벗고 나선 것은 62년 2월부터였다.
김씨는 62년 2월초 대통령특사자격으로 태국·말레이지아·월남·필리핀·홍콩을 방문하고 귀로에 일본을 방문했다.
2월21일 김종필중정부장은 「이께다」수상과 회담하고 전일에는 「고사까」(소판) 일본외상과 회담을 가진뒤 『한일문제의 타결을 의해서는 두나라 사이의 정치회담이 필요하다』는 발표를 했다.
김중정부장의 주도에 따라 당시 최덕신외무부장관이 3월12일 한국대표단을 이끌고 17일까지 정치회담을 벌였으나 대일청구권문제에 이견이 생겨 진전없이 돌아왔다.
62년 10월20일 김종필중정부장이 미국과 일본을 방문한다는 발표가 있었고 김씨는 「러스크」미국무장관과 요담을 한후 귀로에 일본에 들러 11월12일 「오오히라」(대평정방)외상과 무려 3시간반 동안 만났다.
이 회담에서 청구권문제에 대한 기본적인 합의가 이루여진 것으로 보인다.
대일청구권문제는 무상공여 3억달러, 자관 2억달러 등 선에서 타결된 것이다.
이 정치적 타결의 결과를 갖고 일본자민당의 부총재이며 지한파인 「오오노」(대야건목)가 연말인 12월10일 10명의 당간부 등을 대동하고 서울에와 박정희의장과 2차례 회담을 갖고 떠났다.
하여튼 한일문제는 김-오오히라 간의 메모로 타결되었고 민정이양후라면 이 문제가 재론되면서 굴욕외교반대 데모사태가 벌어지기도 했다.
내가 보기는 김종필씨 등이 한일회담을 서두른 이유가 정치활동이 허용되는 63년이전에 모든 문제를 타결해야겠다는 시간적인 촉박성 때문으로 생각된다. 교섭과정서 소외된 최고위원들의 불만에 대해서도 김정보부장은 『외국과의 교섭과정을 누가 미리 공개하는가. 국가이익을 최대한 보장하기 위해서라도 대외교섭은 비밀로 해야한다』는 논리를 펴 반대파의 입을 막았다.
최고회의 안에서 5기와 8기간의 세력다툼속에서 일단 5기가 판정패를 당했지만 최고회의 내부갈등은 거의 1년이 넘도록 밖으로 표출되지는 않았다.
그러나 공화당창당을 위한 사전조직문제, 한일회담교섭과정 등이 김종필씨를 중심으로한 중석의 독주로 처리되자 김씨에 대한 불만이 점점 높아졌고 최고회의 내부의 반김세력이 형성되고 있었다.
이로인해 최고회의의 권력구조는 △김종필씨를 중심으로한 중정세력과 연결된 김형욱·길재호·옥창호·홍종철씨 등 8기중심의 세력과 △김동하·김윤근·김재춘씨 등 장성급 최고위원을 중심으로한 세력으로 나누어지게 됐다.
그러나 이 세력다툼도 63년 3월11일 박림항·김동하·박창암씨 등의 군일부 쿠데타사건이 터짐으로써 김씨세력의 승리로 끝을 맺는다. 이사건으로 반김세력이었던 김윤량·최주종씨 등도 추가구속됐다. <계속><장창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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