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6)-자유당과 내각(39)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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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9면

자유당의 비극적 종말을 장기집권과 그것이 가져오는 필연적인 폐단들에 연유한다. 자유당의 장기집권은 이대통령의 3선을 밀고갔던 사사오입개헌을 출발점으로 한다. 그러니까 그 개헌은 중대한 정치결정이다. 놀라운 사실은 그같은 중요한 정치실정을 두고 국무회의는 별달리 한 일이 없다는 사실이다. 국무회의란 행정의 실무역일 뿐 정치결정엔 언제나 피동적이었다는 것이 자유당정권후기의 국무회의를 마지막까지 지켜본 신두영씨의 회고다.

<정치에 염증느껴>
『개현파동 직전은 족청제거의 후유증으로 자유당안의 통일이 여의치 못하고 이박사가 연로해 여 야를 비롯한 정가에서 3선까지 안하고 물러나야 한다는 의견이 나올때였다. 외국에서도 그렇게 생각했고 이박사 자신도 측근들에게 <그만두겠다>는 의사를 은연중 나타내기도 했다.
이런 사태에 당황한 것은 이기붕을 정점으로 한 주류파 자유당이다.
이박사가 물러날 경우 그때 막 족청계와 비주류파를 제치고 우위에 올라선 자기들 세력이 다시 그들에 의해 깨뜨려 질 것을 염려했다.
개헌파동때 밖에서는 시끄러웠지만 의외로 내각은 조용했다. 국무회의 석상에서 개헌문제가 직접 거론된 적은 없었고 단지 내무부장관정도는 개헌파동에 관여했을지도 모르지만 내각전체가 움직이지는 않았다.
어쨌든 개헌파동은 이기붕의 주류파 자유당이 주도권을 장악하는 계기가 됐다.
당시 정가에서는 이박사의 3선불출마 성명이 제스처라고 생각했지만 이박사 자신은 처음에는 3선에 출마할 의사가 없었다. 이박사는 이미 80노구에 피로를 느끼는 상태였고 정치에 염증을 차차 느끼고 있었다.
이박사는 국내정치보다는 의세에 관심이 많았고 의세의 거친 틈바구니에서 생존할 수 있는 강력한 후계자를 원했다.
이박사는 이기붕을 자신의 후계자로 생각하지는 않았다. 이박사는 이기붕을 단지 「메신처」로서 이용했지 후계자로 키우기 위한 준비를 전혀 하지 않았다.
이박사는 후계자문제를 놓고 주저했다.
3선불출마 번복성명은 이박사의 추종세력이 자신들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적극 밀었고 후계자를 찾지못한 이박사가 좀더 시간을 벌기 위해 준비기간을 갖는다는 의미에서 이뤄졌다. 이박사는 항간의 소문과는 달리 이기붕을 후계자로는 끌까지 생각지 않았다.
이강석을 양자로 받아들인 뒤의 일이다. 이박사 생신때 장관들이 선물을 갖고 경무대에 들어갔다. 이강석얘기가 나오자 이박사는 <대를 잇기 위해 양자를 맞았지만 재산은 한푼도 물려주지 않을것이니 나를 위한 선물을 가져오지말라>고 장관들에게 말했다. 나중에 경무대를 나오면서 몇몇 장관들끼리 <이박사말이 이기붕의 귀에 들어가면 좋지 않으니 일체 외부에 발설하지 말자>고 의논까지 할 정도였다.
이러한 점을 보더라도 이박사는 이기붕을 후계자로는 여기지 않았다.
이박사는 자신의 뜻을 받들어 주면서도 국내외의 정치를 힘있게 이끌어갈 후계자를 원했지만 두가지조건을 모두 충족시킬 사람을 찾지 못했다. 조병옥 신익희 이기붕씨등 모두가 예외는 아니었다.

<후계자도 안키워>
이박사의 딜레머는 여기에 있었다. 국무회의가 정치에선 중심역이 아니었던 것은 문제의 3·l5선거에서도 엿볼 수 있다. 그만큼 인의 장막은 권력을 경직화한 것이다.
신두영씨의 얘기.
『이강학 치안국장이 3·15선거전 선거에 대비한 경찰조직을 준비했는데 중간에 너무 지나치게 조직해 말썽을 빚었다.
선거조직은 경찰내부의 일반조직과 동떨어지게 조직돼 있었다.
l05 108조직이 그것이다. 105조직은 경찰의 사찰계통을 통한 선거조직이었고 l08조직은 경찰의 일반계통을 따른 조직이었는데 두 조직간에 마찰이 생겼다. 예를 들면 경주에서는 경찰서장은 제쳐놓고 사찰계장을 통해 선거를 치르게 됐는데 서울에서 선거독려차 내려간 사람이 사찰계장만 만나 선거운동을 하게되자 말썽이 생겨났다.
선거직전 하도 말썽이 많자 장관들이 점심을 드는 자리에서 다른 장관들이 최인규내무에게 <왜 잡음을 내느냐>고 물었다. 최내무는 <경찰조직이란게 무섭더라. 한번 지시해 놓으면 나중에 바꾸려고 해도 안된다. 내말조차 안듣는다. 잘못 지시했다가는 내 옆구리에 칼이 들어오게 생겼다. 큰일났다>고 너스레를 떨었다.
3·15 부정선거때 장관들은 부정선거를 짐작했을 뿐이다.
3·15 선거날 장관들끼리 점심을 함께하는 자리에서 한 장관이 야내무에게 <야당에서 무더기표가 돈다고 하는데 어찌된 일이냐>고 물었다.

<이기붕은 메신저>
주내무는 <반대측에서 구실을 만드는 것이다. 선거관리를 맡은 언커크사람들이 무더기표가 있다는 곳의 개표함을 깨봤는데 사전투표한 곳은 없었다. 사람 죽올 노릇>이라고 시치미를 뗐다.
또 3·15선거당시 방간에는 국무회의에서 부정선거를 지시했고 표가 너무 많이 나오자 표를 줄이라고 지시했다고 했으나 그날의 사정은 사실과 다르다. 4·19후 경찰논고에서도 그렇게 됐으나 아무리 당시의 사실을 항변해도 사회적 분위기는 그러한 사실을 믿지않게 돼있었다.
3·15선거날 장관들은 점심을 마치고 각자 집으로 돌아갔다. 내가 국무원사무국에 있었는데 개표상황이 궁금한 장관들이 전화를 걸어와 소식을 묻고는 몇몇 장관은 답답하니 경찰서 상황실에 가봐야겠다고 했다.
나는 <장관들이 직접 치안국 상황실에 가는것은 체통이 서지 않으니 저녁식사후 국무회의실로 나오십시오>라고 했다.
그래서 장관들이 모두 국무회의실에 모였는데 손창환보사장관과 유창준비서관은 바쁜 일이 있어서 나중 밤10시가 넘어서 왔다.
이때 장관들이 개표결과를 보고있다가 대구에서 말썽이 생기자 진내무에게 <대구로 가서 어찌된 일인지 알아보시오>라고 했다.
이것이 나중 잘못 알려져 오해를 샀으니 이날 국무회의실에 모인것은 단지 개표결과가 궁금해서였지 국무회의는 아니었다.
표가 너무 많으니 당황해서 표본분출이라고 지시했다는 소문은 사실과 다르다.
장관들은 부정선거의 내막을 몰랐으며 최인규에게 <장난을 말리라>고 말한 것 뿐이다.
그러나 3·l5 선거당시는 장기집권에서 민심을 잃을대로 잃은 상태였기 때문에 아무리 공정하게 선거를 치러도 부정선거라고 의심을 받게 마련이었는데 공무원들이 과잉충성을 하게되자 말썽이 일어나게 된 것이다.
3·15 부정선거는 선거자체도 그렇지만 선거에 이르는 과정에서 잘못된 것이 너무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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