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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 Report] 피 말리는 '치킨게임' 정유사 잡아 먹을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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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2면

세계 3위의 정유업체인 시노펙은 텐진(天津)을 비롯한 중국 내 3곳에서 하루 70만 배럴 규모의 정유 공장 건설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이는 국내 3위 정유업체인 에쓰오일의 하루 정제량(66만9000 배럴)보다 많은 수준이다. 계획대로라면 시노펙의 정제량은 일 평균 461만 배럴로 뛰어오른다. 세계 5위인 아람코 역시 단독으로 일 평균 80만 배럴, 중국 시노펙과 합작으로 40만 배럴 규모의 정제시설을 추가 건설 중이다.

 영국의 정유회사인 머피는 밀포드 해븐 지역에 있는 정제공장(일 생산 13만5000 배럴)을 폐쇄키로 했다. 매수자를 찾는데 실패해서다. 중국이나 인도와 달리 유럽지역에선 정유공장 폐쇄가 한창이다. 2008년부터 2013년까지 프랑스 내에서만 58만 배럴 규모의 공장이 문을 닫았다. 독일(일 40만4000 배럴)과 영국(일 39만2000 배럴) 등을 합하면 최근 6년간 유럽에서 폐쇄된 정유시설은 일 182만8000 배럴 규모에 달한다. 우리나라 1·2위 정유사인 SK이노베이션과 GS칼텍스의 생산량을 합한 것(198만 배럴)과 비슷한 수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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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로벌 정유업계가 본격적인 ‘치킨게임(chicken game)’에 돌입했다.

 중국과 중동업체들은 계속 생산량을 늘리는데 반해 가격 경쟁력을 잃은 유럽과 일본기업들은 공장 폐쇄에 내몰리고 있다. 과거 반도체 시장에서 벌어졌던 양상이 그대로 재현되고 있다. 이번 치킨게임에서 승기를 잡은 쪽은 든든한 ‘자국 물량’을 앞세운 중국과 ‘셰일가스 개발+산유국 지위’파워를 가진 미국이다. 상대적으로 개별 회사의 정제 규모가 적고 원유 산지와 멀리 떨어져 있는 우리나라와 일본, 유럽 소재 정유사들은 코너에 몰렸다.

 전쟁의 시작은 역시 산유국간 피말리는 기싸움 못지않은 정유사간 증산 (정제 물량)경쟁이다.

 중국의 경우 2008년 일 872만2000 배럴 선이던 생산량을 2013년 1259만8000 배럴로 45% 가량 덩치가 키웠다. 같은 기간 우리나라는 271만2000 배럴에서 288만7000 배럴로 소폭 늘어나는데 그쳤다. 익명을 원한 정유업계 관계자는 “정유는 생산량을 키울수록 유리한 규모의 경제 산업”이라며 “당분간은 계속 수세로 버틸 수 밖에 없다”고 전했다.

 사정이 이렇다보니 업계 내부에선 올해 안에 국내 주요 4개 정유사 중 한 곳이 매물로 나올 수 있다는 우울한 전망까지 나돈다. 일부지만 미국 내 셰일가스 업체들도 줄도산 위기에 몰렸다. 불길한 조짐은 현실로 바뀔 기미다.

 8일(현지시간) 블룸버그 통신 등에 따르면 미국 텍사스 주 오스틴의 중소업체 WBH에너지가 이날 법원에 파산을 신청했다. 회사가 갚지 못한 빚은 1200만 달러(약 130억원). 지난해 호주 업체가 파산한 경우는 있었지만, 미국 회사가 파산보호를 신청한 경우는 이번이 처음이다. 톰슨로이터는 “서부텍사스산원유(WTI) 가격이 배럴당 40달러대에 진입하면서 대부분 셰일 에너지 회사들 앞에 ‘지옥의 문(Hell Gate)’이 열렸다”고 전했다.

 사실 최근 저유가로 국내 정유산업의 위기가 갑작스레 불거지고는 있지만, 이미 수년 전부터 이런 어려움은 예견돼 왔다. 실제 국제유가가 급락하기 직전인 지난해 3분기까지도 국내 업체들은 정제사업에서 계속 적자를 내고 있었다. 당시 두바이유의 평균 유가는 배럴당 100달러를 넘기는 상황이었다. 이와 관련 국내 정유업체 관계자는 “2010년 전후에 수익이 최고조에 달했을 때 단맛에 취해 선제적인 준비를 하지 않았기 때문”이라며 “요즘은 정제마진이 급격히 줄어든데다, 아시아 역내에서 휘발유가 남아도는 바람에 수요처도 찾지 못하는 형편”이라고 전했다.

 국내 정유사들이 미래 먹거리 개발에 게을렀던 점도 상황을 악화시켰다. 엑손모빌을 비롯한 글로벌 수위권 정유사들은 2000년대 초반부터 기존 정제관련 사업부문을 빠르게 정리하고 자원개발에 집중했다.

 반면 국내 정유사들은 매출의 70% 이상을 정제에만 매달려왔다.

 정부도 오르는 기름값을 잡는 데에만 주력할 뿐 선제적인 산업구조 개편에는 관심이 적었다. 산업통상자원부는 지난 9일에도 석유·LPG업계 대표들을 불러 제품 가격 인하 방안을 내놓으라고 다그칠 뿐 별다른 대응책은 내놓지 못했다. ‘악수(惡手)’가 반복되면서 국내 정유사들은 ‘이대로 가다가는 망할 수도 있다’는 위기감에까지 몰려있다. 정철길(61) SK이노베이션 총괄사장이 지난 2일 신년회에서 “지금은 눈에 보이지 않지만 살과 피가 튀는 전쟁의 한 가운데에 있다”며 “죽을 각오로 잃을 수도 있다는 각오로 싸우지 않으면 이기지 못한다. 사즉생(死卽生)의 각오로 싸워야 한다”고 위기감을 강조한 이유다.

 급한 대로 살길을 찾아야 한다는 조언도 나온다. 업계에선 “국내 정유사들이 일단 바잉 파워(buying power)에 걸맞는 목소리를 회복해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국내 정유업계에서 수입하는 원유 수입량은 일 평균 246만 배럴(2013년 기준)로 전세계 5위이지만, 비슷한 수입량의 인도(283만 배럴)나 독일(238만 배럴)보다 지불하는 수입단가는 훨씬 높다. 원유 수입 단계에서부터 경쟁 국가에 밀리는 셈이다. 중동산 원유의존도가 80%에 육박한다는 점도 부담이다. 중동 정세 등에 따라 언제든 수급에 차질이 생기는 리스크에 노출돼 있다. 지금까진 정부의 적극적인 역할도 부족했다. 서울대 정광호 교수는 “석유 제품가 인하라는 좁은 정책 목표를 넘어 적극적으로 산업을 재편할 수 있는 비전을 제시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실제 일본에선 정부 주도로 정제시설 폐쇄가 한창이다. 일본 정부가 정유업체 생존에 필요한 고도화율 설비 기준 등을 제시하고 이를 맞추지 못한 정유업체와 설비들은 자연스레 문을 닫는 식이다. 여기에 일본 정부는 정유사 간 통합을 유도하고 있다. 규모의 경제를 위해서다. 정 교수는 “위기라고는 하지만, 지금이야 말로 공격적으로 사업구조를 개편해야 할 때”라며 “단순 정제사업보다 윤활유 생산이나 기타 다른 제품으로의 수입선 다변화도 더 공격적으로 추진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이수기·강남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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