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90)제79화 육사 졸업생들(143)공륜단 출동 지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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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1면

박 소장이 출동독려를 위해 김포 공수단으로 떠나자 길재호(60· 평북 영변· 6, 7, 8대 의원·8기) 유승원(62·인천· 8특· 전 국회의원· 인천시장) 강상욱(55· 원산· 6, 9대 의원· 청와대 대변인 역임·9기) 중령 등 7명도 당시 출동을 주춤거리고 있는 33사단을 독려키 위해 서울 근교 사단본부로 떠났다.
그러면 당시의 공수단 사정은 어떠했는지를 살펴보자.
그날 낮 안성과 도봉산에 훈련차 출동했던 부대들이 부대에 도착한 것은 밤 10시께.
그러나 혁명출동이 사전에 누설 돼 장도영 총장으로부터 부대를 일절 움직이지 말라는 지시가 있어 단장인 박치옥 대령(5기)과 대대장 김제민 중령(9기)은 진퇴유곡에 빠졌다.
더구나 장 총장의 명령으로 급파된 특전감 장호진 준장이 도착해 감시하는 바람에 움직이기가 더욱 거북한 상황이었다.
박 소장이 6관구 정문에서 체포된 줄 알고 공수단으로 발길을 돌렸던 장경순 준장도 도착해 있었다.
그러나 박치옥 대령은 당시 혁명조직이 철저히 점 조직으로 짜여져 있어 장경순 준장이 왔는데도 장 준장이 장 특전감과 함께 감독하러 나온 줄 알았다가 나중에야 동지인 것을 알았다고 한다.
당초 계획은 공수단이 제일 먼저 서울에 진주키로 되어 있었고 장면 총리가 묵고 있던 반도호텔을 점령하고 내무장관 등 요인을 체포키로 되어 있었다.
그런데 이 선두부대의 출동이 지연되고 있는 것이었다.
혁명 공식기록은 출동이 늦어진 이유를 단장인 박 대령과 대대장 김제민 중령 등 고급장교들의 모호했던 태도 때문이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즉, 『장경순 준장과 중앙동지들이 부대출동을 강박했으나 장 총장의 잇단 육성 지시와 또 자정이 넘어서부터는 10여 회에 걸친 파상적인 저지 확인전화에 출동부대는 점점 암담해지는 형편이었다』고 적고 있다.
이렇게 고급장교들이 모호한 태도를 보이자 격분한 위관 급 지휘관들이 탄약고 열쇠를 부수고 탄약을 배분해 강행할 기세를 보여 부대의 명령계통은 전혀 무시될 단계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그러나 당사자인 박 대령의 후일 증언은 다르다.
박 대령은 총장의 특명에도 불구하고 물러설 수 없는 입장에 빠진 것을 알고 출동대기 태세를 갖추고 6관구에서 보내기로 한 차량을 기다렸다가 늦게 도착한 바람에 단원을 승차시키던 중 박 소장이 나타났다는 것이다.
박치옥 대령은 혁명 후 최고위원까지 지냈으나 그후 장도영의 군 일부 쿠데타 음모사건과 관련돼 김제민 중령과 함께 구속돼 혁명 주체세력에서 탈락됐다.
그후 박 대령은 석공 이사로, 김제민 중령은 조폐공사 이사를 지냈다.
여하튼 박 소장이 공수단에 도착, 출동을 독려해 예정보다 늦은 새벽 2시 10분 출동하기에 이른다.
이때 박치옥 대령은 박 소장에게 경호장교로 차지철 대위(전 대통령 경호실장)를 붙여 줬다고 한다.
차 대위는 당초 계획으로는 반도호텔 점령군 조로 20여 명의 대원을 지휘, 호텔 엘리베이터를 맡기로 돼있었다고 한다.
박 소장은 공수단을 독려하고 해병대의 출동을 독려키 위해 김포로 가던 중 염창교에서 이미 출동한 해병대를 만났다.
당시 장도영 총장은 해병대까지 관련된 줄은 까맣게 모르고 있었기 때문에 해병대만이 유일하게 예정된 H시에 출동해 있었다.
박 소장은 여단장 김윤근 준장(57·황해 은율·해사 졸)을 보자 눈물을 글썽이며 반겼다. 박 소장은 김 준장에게 『30사단에서 기밀이 누설되어 공수단 출동이 늦어졌으니 해병대가 앞장서 줘야겠소』라며 출동계획 변경을 알렸다고 한다. 그래서 제1진 해병대, 2진 공수단으로 하여 한강을 넘게 된 것이다. 해병대 김 준장은 박 소장과 일찍부터 인연이 있는 사람이다. 즉, 박 소장의 만주 군관학교와 일본 육사 후배인 그는 그 동안 쭉 개인적 친분을 유지하고 있었다고 한다.
예비역 해병 소장으로 혁명에 참여했던 김동하 장군(63·함북 무산)도 만주 군관학교 1기생으로 박 소장(만군 2기)의 선배라는 인연으로 혁명에 참여했다.
김 준장은 5·16 이후 수도방위사령관·최고회의 교체위원장을 지냈고 호남비료 사장도 지냈다.
김동하 소장은 최고회의 고문·운영위원장 등을 맡았으나 공화당 창당과정에서 김종필씨와 충돌해 63년 2월 모든 공직에서 사퇴하기도 했다. 그후 박림항 중장 등의 군 일부 쿠데타 사건에 관련돼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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