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2)자유당과 내각(35)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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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9면

족청계가 간첩사건으로 수난을 당하던 53년 여름,이대통령은 족청계 장관을 내각에서 내쫓고 자유당에서도 족청계를 제거하라는 담화를 냈다.국민회전국대회 하루전날 발표된 대통령 담화는 이랬다.

<이박사,담화발표>
『일체의 파당요소를 제거하기 위하여 국민회대표를 다시 선정해서 이의없는 정식대회를 개최해야 할것이다.자유당도 중앙당간부나 지방당부 할것없이 족청계는 하나도 선거하지 말것이며 소위 족청계도 물러나고 족청계를 반대해온 비조청계중 이전부터 당직을 오래 붙들고 있던 사람들도 쉬어있게 하라. 자유당안의 적청세력 부식에 모모 인사를 중심하여 내가 주장하는 의도와 대립되어서 필경은 자유당 자체가 분규싱태에 이르러 해결하기 어렵게 되었으니…몸 전체에 병이 퍼져 고통을 받기전에 잘라버려야 되는것이다.』
당시 국무원 사무처장이던 신두영씨는 족청계 장관들이 해임된것은 그들이 족청이라는것 때문은 아니었다고 했다. 족청을 제거하라는 담화 역시 그 내용이 보여주듯 족청거세라기 보다는 자유당안 파쟁의 수습이라 당 차원에서였고 공개담화가 나오게 된것도 족청자체에 원인이 있었다고 했다.
신씨의 회고.
『진혜직·신중목장관 파면은 족청계 거세과정에서 일어난 사건은 아니다. 이박사는 종종 행정채널을 무시한채 행정을 정치의 차원에서 다루었고 따라서 절차보다 결과를 중시했는데 이것이 인사에도 그대로 반영됐다.
이박사는 도로에 가로수가 없는것을 보고 신농림장관에게 나무를 심도록 지시했다.
그러나 농림부에서는 도로사정을전혀 몰랐기때문에 일을 제대로할수 없었다. 나무는 비록 농림부산림국에서 관리했으나 도로는 내무부에서 관리했기 때문에 농림부단독으로는 일을하기가 불가능했다.
이래서 이박사는 나중에 내무부에 이 작업을 맡겼는데 내무부는 경찰을 모두 동원해 작업을 마쳤다.
그뒤 이박사는 진혜직내무장관에게 산림녹화를 하라고 지시했다.
진장관은 치안국 보안과에 나무를 심도록 지시했으나 보안과장으로는 산림녹화가 경찰의 힘만으로 할수있는 일이 아니었기 때문에<치안국과 농림부 산림국이 협조해야하는데 왜 치안국에 시킵니까. 산림부에서 할일입니다>라고 했다.
그러자 진장관은 화가나서<대통령이 시키는데 어떻게 하느냐>며 무조건 일을 하도록 지시했다.
이때부터 농림부와 내무부는 사이가 벌어지기 시작했느데 신중목농림은 자신이 소외된데 화가나 곧 농촌실태조사에 나서 농민잡부금을 조사해 대통령에게 보고했다.
이대통령은 사소한일로 장관들이싸우는데 화가나 두사람을 한꺼번에 파면처리하고 말았다.
당시 진장관이 사표를냈다고 한간에는 알려졌으나 두장관은 사표낼 마음도 없었고 사표를낼겨를도 없었다.
본인들도 모르는 사이에 경무대에서 총무처로 직접 「파면처리」 지시가 내려왔던 것이다.
이때 권대일 내무부지방국장도 함께 파면처리됐는데 권국장은 나중에 사표를 냈으나 수리되지 않았고 장관은 사표를 낸적이 없었다.

<백두진에 모략도>
그런데 두장관의 파면처리과정에서 억측이 생켜나게 된것은 정국은사건이 터지면서 진장관이 조사를 받게되니까 그사건을 서로 연결시켜 족청이 거세되는 과정으로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또 진·신두 장관이 파면되기전 나온 이박사의 족청제거성명도 항간의 소문과는 다르다.
족청제거 성명이 나오기전 족청계의 백두진에 대한 모략사건이 있었다.
이박사는 이 사건을 알고<족청을해산하라>는 지시를 내렸다.그런데 이 말이 주류파 자유당을 통해 흘러나와 정가에 퍼졌다.
그러자 당시 내무차관 황호현(족청계)이 진장관도 모르게 기차를타고 다니면서 각도의 경찰국장에게<족청계 없앤다는 소리가 나오는데 사실무근>이라는 내용의 글을 전달했는데 그중 1장이 이박사에게 들어갔다.
그러자 이박사는 몹시 화를 내며<조용히 해산하라니까 이따위 것한다>며 족청제거 공개성명을 발표하기에 이른것이다.
족청의 거세는 세상에 알려진것과는 다른점이 있다.
결과적으로 족청계가 제거된것은 사실이지만 과정에 있어서는 다른것이다.

<원용덕, 끝내남아>
이박사는 애당초 족청을 크게 평가하지않았고 족청계를 전부 제거할 생각도 없었다.단지 힘을 합쳐 자신을 돕지못하고 분란을 일으키는것을 못마땅하게 생각했을뿐이었다.
족청계 소리를 듣던 원용덕헌병사령관이 끝까지 남아있던것이 이를 증명한다.
결국 이기붕의 등장을위해 족청이 제거된것이 아니고 족청이 무력해지자 이기붕이 그틈을 이용등장한 것이다.
결과는 같지만 과정은 다른 것이다.
정국은 간첩사건도 이대통령이 내사를 지시한것은 아니었다. 이 사건을 처음 문제삼운 것은 국회에서였다.
52년 연말께 윤치영의원은 국회본희의에서 『주일연합군사령부로부터공산당관련 혐의로 퇴거명령을 받은 사람(정국은을 가리킴)이 대한민국에 와서 어떤 의원(양우정을 말함) 과 연결되어 3부장관과 밀착해 국정을 조종하고 있다』 고 폭로했다. 이 발언을 계기로 내사가 진행되었다.사건을 북무대가 맡게된것도 이대통령과는 무관하다는것이 신두영씨의 회고다.
『손원일국방은 해군참모총장시절 영국「엘리자베드」여왕 대관식에 참석키위해 배를 타고 강기간 여행했는데 이때 김창용도 함께 갔기 때문에 두사람이 친하게 지내게됐다.
후일 백두진총리가 손원일을 국방장관으로 앉히자 손국방은 때마침 발생한 정국은사건을김특무대장에게 맡긴다.
정국은사건 전만해도 김특무대장은 군에서만 알려졌을뿐 밖에는 알려지지않고 있었는데 정국은사건을 계기로 두각을 나타내게 된다.
당시 큰 사건은 거의 원용덕헌법사령관이 맡고있었는데 손국방은 정국은사건을 일부러 김창룡에게 맡겼던 것이다.
김특부대장은 정국은사건 (53년8윌)이 발생하기 훨씬 전(51년5윌)에 특무대장이 됐으나 저어계에는 존재가 미미했었는데 정국은 사건을 계기로 원용덕을 능가하는 실력자로 성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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