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칙과외"…소리 안높이고 단속 할수없나|이웃끼리 감친해야하는 풍조도 문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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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동·서를 막론하고 지금까지 시인들이 가장 즐겨 부르던 주제는 「사랑」 이었다. 사랑을 할때 사람들이 가장 순수해질수 있다고 본다면 사랑이란 감정은 가장 순수한 인간감정이라고 할수 있다. 그리고 이런 사람의 감정, 괴로움을 통해서 사람은 그 내면의 깊이를 더하고,인간의 폭을 더 넓히게 되기도 한다.
또 사랑을 할때에 사람의 마음이 가강 아름다와 질수 있다고 본다면 아름다움을 찾고, 또 아름다움을 노래하는 시인이 사랑을 즐겨 불렀다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얘기라고 할수도 있다.
그러나 요새 사랑을 노래하는 시인은 거의 없다. 뿐아니라 소월의 시를 찾는사랍도 이제는 별로 없다. 「하이네」를 아는사람은 더욱 없다. 사랑이라는 지극히 개인적인 경험보다 훨씬더벅찬 역사적·정치적 문제들이 너무나도 많기 때문이라고 할까. 아니면 오늘과 같은 불신의 시대에서는 사람 그 자체마저 믿을 수 없게된 때문이라고 할까. 혹은 또 사랑을 성립시키는 요소들을 오늘의 사회에 서로 찾아보기 어려워진 때문이라고 할까.
분명 현대는 사랑의 불안지대나 같다. 사랑을 담기에 제일 어울리는 서정시가 자취를 감춘 이유도 이런데 있다.
우리네 생활주변에서 자춰를 감춘것은 사람의 시만이 아니다. 러브레터도 이제는 찾아볼수 없게되었다. 오늘의 젊은 세대에게 있어서는 러브 레터는 오히려 웃움거리일뿐이다.
스피드의 시대를 사는 세대답다고도 하겠지만 러브레터를 안쓰게된 까닭은 사람들이 성급해진 때문에서만이 아니다. 사랑을 보는 눈이 어제와 오늘과는 크게 달라진 때문도 있겠지만 뭣보다도 말보다는 행위률 더 소중하게 여기게 된 때문이기도 하다.
그리고 행동을 더 중요시하는것은 말을 믿지 않게된데 가장 큰 까닭이 있는 것같다.
속담에「말로 천냥빚을 갚는다」는게 있다. 그만큼 말이 소중하게 여겨지던 때에 생긴 속담이다. 그만큼 말을 액면그대로 받아들일수있던 때에나 통용되는 얘기다. 지금은 다르다. 남의 말을 그대로 받아들일만큼 어수룩한 사람은 없다고들 여기고있다.
우리는 모두 말의 인플레현상에 젓어있는 것이다. 인플레때에는 물건값이 오른다. 이와 반비례해서 그 물건의 실질가치는 상대적으로 띨어지게 마련이다. 물건이 흔해져도 값은 떨어지게 마련이다.
언어도 마찬가지다. 가령 해방이후 누구나가「애국」을 내세웠다. 애국을 내세워가며 개인적 야욕을 채우려던 정치가들이 많았는가하면 나라를 앞세워가며 법을 어기는 일도 많았다.속배만을 채우면서도 겉으로는 그럴싸하게 민족자본등을내세운「애국」상인들도 많았다. 이래서「애국」이라는 말의 실질가치는 엄청나게 하락되었다. 법이니 정의니 하는 말들도 같다.
그동안 정부에서는 물가인플레를 한자리표로 잡았다고 하지만 말의 인플레만은 잡지못하고있다. 말이란 원래 의사의 전달을 위해있다. 또한 말 하나하나가 모두 그대로 특정한 사상의 상징이기도하다. 따라서 말이란 그 말이 담고있는 내용과 완전일치률 보아야한다. 말이
내용과 일치하지 않을때에는 그 말의 가치는 하락되지 않을 수 없다.
이래서「말로 천냥빚을 갚는다」는것은 옛말이되고 이제는 천냥빚에는 역시 말 몇만마디 보다도 당장에 눈에 보이고 손으로 잡혀지는 현물을 더 치는 현금주의가 판을치게 된것이다.
언어의 값을 떨어뜨리게 만든 것에는 또 하나가 있다. 우리는 요새 툭하면 무시무시한 말들을 지극히 아무렇지 않게 쏜다. 지난번 조치동의 기악전을 두고 어느 신문은「목숨을 건 봉국」이라고 보도했다. 장정구의 타이튼전을 「필사의 혈투」라고 표현한 어느 권투해설자도 있었다. 그는 김득구의 비극의 재연이라도 바라고 있던것인가?
이래서 웬만한 말에도 눈하나 깜빠이지 않을 만큼 우리의 언어감각은 무디어졌다. 그래서 관심을 끌기위하여는 더욱 과격한 말, 더욱파장된 표현을 쓰게되어 이를 따라 말의 실질가치는 더욱 떨어지게된다.
뇌임있는 자리에 앉아있는 사람이 뒷감당도 하지 못할 말을 무책임하게 하는것도 말의 인플레현상을 부채질해 나가기도 했다. 그리하여 아무리 발본색원한다고 당국이 으름장을 놓아도 한두번의 단간으로 혼이 나는 정도로는 믿지않을 정도가 되었다.
요새 남몰래 자녀들에게 변칙과외수업을 시키는 상류층 학부모들이 늘어난 모양이다.
그들은「발본색원하겠다」는 말을 믿지 못한것이다.
그리고 지금까지의 다른 단속들이 다 그랬듯이 과의수업도 바람이 한번 지나고나면 괜찮으려니 하고 마음을 놓은 것이다.
그러니까「발본색원」이라는 말이 제값을 되찾기 위해서도 변칙과외 수업의 단속은 졔속되어야한다.
한가지 납득이 가지 않는 일이있다면 소리없이 단속을 하지 앉고 왜 단속을 하겠다는 말부터 하느냐는 것이다.
말이란 자기가 생각하는 것을 표현하기 위해서 인간에게 부여된것이라고「몰리에르」가 말한적이 있다.
그러나 그의 뒤를 이어 「탈래랑」이란 정치가는 말이란 자기가 생각하고 있는 것을 속이기 위해있다고 말했다.
확실히 요새는 「믈리에르」 의 말이 틀리고 오히려 「탈레랑」의 말이맞는것만 같다. 그러니 러브레터룰 아무도 믿지않고 따라서 아무도 쓰지 않으려 하는것도 당연한 일이다.
우리는 사랑이란 말을 쓰는 것부터가 쑥스러워질만큼 녀무나도 산문적인 생활에 젖어있다. 그만큼 우리주변의 모든것이 물질화되고 거칠어지고, 그리고 솔직하지 못하게 되어가며 있다.
우리가 아쉬워하는 것은 사실은 사람의 시가 아니다. 나와 남 사이에 오가는 따뜻한 입김만이 만들어 낼수있는 사랑의 감정을 별로 아쉬워하지 않고 있다는, 또는 사랑의 능력을 상실하고 있음을 모르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리하여 가령 돈이 없어 남들은 못하는 과외수업을 자기 자식에게만 시키면서도 떳떳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는 이웃이 이웃을 감친하고 고발하게 만드는 풍조도 여간 가슴아픈게 아니다.
우리가 말을 못믿게된것도 따지고 보면 사람 자체를 믿지 못하게된데서 나온 현상인 것이다. 단순히 러브레터로 끝나는 문제가 아니다. 사랑의 복권에 앞서는 것은 인격의 복권이기때문이다.
부활절을 맞아 기독교인이 아니면서도 느껴지는게 참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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