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통속의 희망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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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사회를 지탱하는 힘은 흔히「믿음」이라고한다.
그것은 꼭 서구문명을 지탱해온 그리스도교와 그 사회가 이루어온 성과만이 아니다. 이미 2천5백년전에 동양사회에 있어서도 믿음, 곧 신의를 내세웠던 공자와 그의 제자들에게서도 찾아볼수 있다.
그러나 오늘날 그리스도 교도들은 사회를 지탱하는 믿음에서 특히 종교적인 전성을 강조하기 시작하고있다.
그것은 오늘의 세계가 종교적인 토모를 강질하고 현세적인 쾌락과 이욕만을 추구하는 시대로 줄달음 치고있다는데서 나온 반동이다.
세계는 전반적으로 도덕적 타락에 빠져들고 있으며 핵전쟁의 위험위에 하루하루 불안한 삶을 보내고 있다.
그런 상황에서 종교인들은 기껏 절도문이나 외고 명상에 잠기거나 혹은 성기를 연구하는 일로 구원되기를 바라고있다.
그것은 오히려 좀 나은 편이다. 대부분의 신자들은 교회에 나가고, 성서룰 읽으며 죄의 용서를 비는 순간을 갖는 것과 함께 교회를 벗어나면 당장 세속적인 이옥싸움에서 하느님의 눈을 피해 비열하고 추악한 도덕적 타락을 일삼는 경우가 없지앉은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최근 구미의 그리스도교도들 가운데는 사회의 종교적 영성을 회복하고 사회의 곤악함을 되살려야 한다는 운동이 일고있다고 한다.
신성함, 영성이 없다는 것은 곧 도덕이 부재하며 의가 없으며 믿음이 없어진 사회라는 뜻이다.
무언가 허탈하고, 무엇가 아쉽고, 무언가 횹족하지않은 생활을 어떻게 극복할수 있는가가 오늘의 과제인 것이다.
그리스도교도들이 그같은 질문앞에서 타성적이고 형식적이며 거짓된 대답이 아니라 참된 신앙의 양심에 따라 행동할수 있는 용기를 갖게된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다.
그때문에 그들 사회의 영성을 화복해야 한다는 입장에 사람들은 핵전쟁의 위험을 경고하며, 낙태의 유행과 포르노문화의 패배를 경계하며 사회의 비리에 대한 도전으로 「하느님의 역쟁하심」 을 실천하고자 나서고 있다.
이것이 꼭 60년대의 포망의 곤학, 정치곤학의 재건을 의미하는 것만은 아니다.
거기엔 부활절을 맞는 한국의 현실에서도 특히 유념하지 않으면 안되는 일면이 있다.
부활의 사건은 예수가 죽고 사홀만에 되살아난 2천년전의 일이지만 그리스도교도들은 거기서 정의의 궁극적인 승리를 배우며 포망과 용기를 얻어야한다.
부활절은 그리스도교도들의 명절이되고 있지만 그것은 예수의 고난의 의미률 되새기는 계기가 되지않으면 무의미한 행사일 뿐이다.
예수의 고난과 부활사이 사홀동안에 괴로와하며 믿음의 시련을 겪어야했던 그 제자들이 예수의 죽음앞에서 살기위해 홑어졌고 실망과 어두움의 길을 갔다가 그의 부활과 함께 삶의 방향을 잡고 포망의 삶을얻었다는 성서적 사실에 대해 반성하는 바가 있어야겠다.
어둠과 절망은 이세상 모든 사람들이 겪어야하는 도정이다. 개인적 시련이 될수도있고 또 사회적 고통, 인류의 아픔일수도 있다.
중요한것은 그 고통과 절망을 인내하고 극복하는 용기와 진실추구의 신념일 것이다.
불의가있고 부조리가 있고 고통이있는 삶에서도 그것을 극복하는 신념과 용기는 새로운 삶의 의미를 보장한다.
험하고 어두운 세계를 밝고 활기찬 세계로 만들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것은 바로 현세에 사는 인간의 숙명이기도하다. 아마도 그것은 하느님의 역사속에서 인간이 하느님을 대신하여 밝고 올바른 세계룰 건설한다는 신념의 표현일수도 있다.
그런 의미에서 고통을 극복하고 평화를 얻는다는 것은 반드시 그리스도교인들의 과제만도 아니다. 세상을 살아가는 모든 사람이 자기들이 사는 세상을 아름답고 밝게 만들어야한다는 것은 어쩔수 없는 책임이라 할수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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