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이당의 유일한 여제자 동양화가 배정례씨(67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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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1면

「아버지의 아호가 진제로 단제선생님과 무척 친하게 지냈습니다. 사랑방에 모여 함께 서화를 즐기시곤 했는데 6살때부터인가 나도 함께 앉아 글읽는 시늉, 그림 그리는시늉을 한것이 평생의 길이된 셈이지요.』
동양화가 숙당 배정례씨(67)는 자신의 생은 아버지가 결정지어준거나 마찬가지라고 말한다.
결혼후 일본미술학교를 중퇴하고 돌아왔을때 친구인 이당 김은호의 문하에 넣어 미인도를 배우게 한것도 바로 아버지 배석린씨였다.

<아버지는 문인화가>
숙당의 아버지도 문인화를 한 화가로 선전에 특선까지한 사람.
『「내가 점치건대, 이당선생한테 미인도를 잘 배워두면 내일생에 큰 도움이 될 것같다」 고 아버님이 말씀하셨어요. 그 말대로 그림은 내 일생의 반려였으며, 내 가족과 나를 먹여 살린 생계수단이되어 주었읍니다』
충북 영동에서 8남매의 맏딸로 태어난 그는 아버지가 고흥·남원등두 군수로 다니는 동안 광주에서 고등학교를 나왔다.
19살때 일본 명치대 법과l학년인 박기배씨와 결혼, 일본으로 유학을 떠났다.
남편이 학교를 마치고 조선총독부에 취직이 되어 귀국하게되자 그도 학교를 중퇴하고 서울로 왔다.
서울의 첫 보금자리는 권농동 이당댁의 문간방.
『월전·운보등 제자 30명이있었는데 여자는 오직 나 하나였지요. 이당선생님은 그 전에도,그 후에도 여자 제자는 받아들이지 않았읍니다』
이당댁 문간방에서 첫 아들을 낳은후 시아버지가 사준집으로 이사했다.
『대학교때도 그랬지만 한국에 돌아와서도 남편은 술을많이 했어요. 술에 얽힌 이야기라면 진저리나는 것이 한두가지 아닌데, 특히 선전출품을 위해 그려놓은 미인도의 눈을 담뱃불로 지져놓은 것은잊을 수 없는 일입니다』
술친구를 곧잘 집으로 불러들이는 남편이 어느날 친구들과 「대접이 소홀하다」 는이유로 거의 완성된 그럼을 담뱃불로 망쳐 놓은 일은 지금 생각해도 약이 오른다고했다.
해방이 되고 남편은 정치에 뜻을 두어 국회의원 (2대) 에 당선되기도했다.
그러나 연이은 선거에서 낙선, 이들 가정은 빚더미에 올라 앉았다.
『시집올 때 해남의 l개면이 전부 시집땅일 만큼 부농이었지요. 그 재산이 선거때문에 모두 없어지고 말았어요.』
이때부터 생계는 숙당이 꾸려가야했다.
전국 방방곡곡을 다니며 그림을 그려 지방전을 가졌다.
다방 하나를 빌어 표구도 안한 그림을 걸어두고 개인전을 한적도 있다. 다행히 지방마다 그림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있어 잘도 팔러 나갔다. 그러나 숙당의 지방전은 미술계의 많은 비판을 받았다.
당시만 해도 지방전은 화가들에게 수치스려운 것으로 통했기 때문이다.
『남편이 선거에 낙선하고 숙당이 그림으로 생활한다지』『서울에서 개인전을 하지, 왜 지방에서 하는지』『과일망신모과가 시킨다』 등의 뒷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그는 울고싶은 심경이었다고 했다.
2남1녀의 어머니로, 주부로, 또 아내로서의 역할을 해내며 그림을 그려 팔아 가계를 꾸려간다는 일이 정말 쉬운 일이 아니었다고 회상한다.
더우기 밖에서 남자 후배라도 만나 다정하게 이야기 나눈 것이 남편의 눈에 뜨였을때 집에 돌아오면 으레 주먹 한대쯤은 날아올 것을 각오해야만했다.
미술계에서는 이같은「숙당의 고생」이 적지않은 화재가 되고 있었다.
7년전 남편이 세상을 떠나고 숙당은 자녀들을 교육시켜 모두 출가시켰다.

<고생많이해 〃유명〃>
『이제부터가 바로 나의 생』이라고 그는 이때 선언했다고 한다.
생계수단으로서의 그림이 아닌, 진정 그려보고 싶은 그림을 그려야겠다는 결심을 했다는 것.
3년전 그가 찾은 곳은 시집이 있는 해남. 지난 세월동안 남편 형제가 산소터까지 없앤 형편이어서 우선 시부모의 묘역조성을 하고 남편의 묘자리도 꾸며 곧 이장할 계획을 세우고 있다.
『고운 정보다 미운 정이 더 많지만 40여년을 함께 살아온것이 이토록 애틋한 감정을 불러 일으키는 줄은 몰랐어요.』
여유가 없어 남편을 공동묘지에 묻은 것이 못내 가슴아프다고 했다.
3년전 대흥사 민박촌에 자리잡은 숙당은 이곳에서 해남 여류다인회를 조직하고 이들에게 묵화를 가르치며 몇 년후의 고희전준비에 여념이없다.
선녀도·신선도·호남절경도등 대작을 만들어 70을 맞는 해에 멋진 개인전을 열어보이겠다는 꿈을 펼쳐 보인다.<김징자기자><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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