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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숙자에 철학 강의… 인문학 교수들이 나서 자신감 '재충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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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8면

▶ 한 노숙자가 입학식에서 『세상을 보는 지혜』 라는 책을 들고 있다. 오종택 기자

21일 오후 서울 용산구 갈월동 노숙인 다시서기 지원센터 3층.

성프란시스대학 인문학과정 학생증을 받아든 '노숙인 인문학도'21명의 얼굴에 생기가 넘쳤다.

다시서기지원센터와 ㈜삼성코닝은 이날 노숙자의 지역사회 통합과 자활을 위해 '성프란시스대학(성공회 계열의 사회교육기관) 인문학 과정'입학식을 열었다. 노숙자들은 성공회 계열 찬송가의 일종이자 교가인 '한 걸음 더'를 힘차게 불렀다.

"모두 한 걸음 더 나가자. 낡은 것은 모두 벗어버리고, 손에 손을 잡고 나가자…."

이들은 44명이 지원해 2대 1의 경쟁률을 보인 선발 과정을 통과한 '정예요원'들이다. 선발 기준은 다름 아닌 '배움에의 의지'.

노숙자 대표로 소감을 발표한 박만기(37)씨는 "내가 철학과 창작을 배운다면 사람들은 비웃을지 모르지만 배움의 마지막 기회라고 생각해 용기를 냈다"며 "공부하고 싶은 마음은 노숙자들도 다른 사람들 못지않다"고 말했다. 박씨는 단순 노무직을 전전하다 1998년부터 노숙자 생활을 해왔다. 가정형편이 안 좋아 대학 진학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는 박씨는 "공부를 한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설레 잠도 못 잤다"고 밝혔다.

18개월째 거리생활을 하고 있다는 김원기(64)씨는 대학 때 행정학을 전공하고 한때 컴퓨터 프로그래머로 활동했었다. 그러나 교통사고를 당해 기억력의 일부를 상실해 거리로 나오게 됐다. 김씨는 "공부를 하면서 스스로를 돌아보고 경제적.정신적으로 자립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했다. 조립식 건물을 판매하다 외환위기 때부터 노숙자 생활을 시작했다는 이승복(46)씨는 "이번 수업을 통해 아무런 희망이 없었던 나의 삶을 의미있게 만들고 싶다"고 말했다.

이들은 내년 2월까지 매주 세 차례씩 철학과 역사.예술사.문학.작문 등의 교육을 받는다.

매주 월요일에는 성균관대 철학과 우기동 교수가 철학강의를 맡고, 목요일과 금요일에는 도서평론가 최준영씨와 김종길 서울시립대 강사가 각각 강단에 선다.

이번 교육은 미국의 빈민교육 활동가인 얼 쇼리스의 클레멘테 인문학 과정을 벤치마킹한 것. 쇼리스는 97년부터 뉴욕 맨해튼에서 노숙자와 마약 복용자들에게 소크라테스식 교수법으로 교육을 시켰다.

권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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